정절의 역사 이숙인 지음·푸른역사·424쪽·2만 원

매년 10월이 되면 충남 보령에서는 도미(都彌) 부인을 기리는 경모제가 열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도미는 백제 사람으로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도미 부인의 고운 외모와 바른 행실을 두고두고 칭찬했고, 마침내 그녀의 이야기는 개루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개루왕은 그녀의 정절을 시험하고자 내기를 제안하지만, 도미 부인이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도미에게 누명을 씌워 쫓아 버린다. 그녀는 도미의 뒤를 쫓아 달아났고, 다시 만난 부부는 고구려 땅에서 여생을 마친다.

끝없는 시련과 위압 속에서도 자신의 정절을 지켜낸 도미 부인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이상적인 부녀자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가부장제와 윤리규범을 토대로 신분 질서를 구축했고, 여성에게는 유교적 부덕의 실천을 강요함으로써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여성의 '정절'이 있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저자는 이러한 조선시대 여성의 억압된 성에 대한 관념과 관습의 역사를 '정절'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한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은 정절의 개념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다. '부계 혈통의 확인과 보장'이라는 현실적 요구에서 고안된 '정절'은 조선의 가부장제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점점 더 관념화되었고 남녀 모두가 아닌, 여성만의 일방적인 의무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국가를 지탱하는 충절과 함께 유교사회 조선을 지탱하는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정절은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경국대전'을 거치며 명문화 되었고 '삼강행실도'를 비롯한 다양한 교육서적은 정절의 방법과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더 나아가 품행이 방정한 절부(節婦)를 발굴하여 포상함으로써 사회의 풍속과 교화를 주도했다. 특히 절부나 열녀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더욱 강조되었는데, 실제로 조선은 왜란과 호란이 초래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의 정절을 사회통합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했다.

'정절을 권장하고 정절을 강제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여성의 삶과 생각을 주도하였고,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되었다. 법과 제도는 관습이 되고 이념과 지식은 풍속이 되어 굳이 외부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여성 스스로 자신을 관리해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367쪽)

저자는 이러한 인식이 유교의 지식체계와 조선의 역사가 빚어낸 산물이라 말하며 이 모든 것이 정치권력과 지식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여성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정절 문제를 비판하는 조선의 지식인들 또한 존재했다. 저자는 조선 전기 '개가 논쟁'을 통해 과부의 개가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는 논의가 전개됐으며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등은 맹목적인 열녀 찬양론을 비판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물론 이러한 자성의 목소리는 역사 속 대부분의 사회가 여성의 성에 대해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체계화 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정절로 읽어 내려간 보수적인 조선사회의 역사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이 역사 담론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고와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재미 보다는 씁쓸함과 불편함을 감출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성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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