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천주교 대전교구 공동기획 충청의 순례길을 걷다 2 당진 '버그내 순례길'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솔뫼성지 조형물.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솔뫼성지 조형물.
솔뫼성지부터 합덕성당, 원시장·원시보 형제 우물터, 무명순교자의 묘, 신리성지까지 이어진 버그내 순례길의 거리는 약 11㎞다. 어디에서 도보 순례를 시작하느냐에 따라 보는 느낌이 달라진다. 천주교 신자들은 순례길이 정비되기 전부터 이 지역을 걸었다. 합덕, 여사울, 신리, 무명순교자의 무덤 등 천주교 성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름 없던 버그내 순례길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대전교구 설립 60주년 기념 성지순례 이후다. 일반인들에게까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내포문화숲길 조성 사업과 맞물리며 길 정비 사업이 시작되고 부터다. 순례길 이름은 합덕면에서 열리던 장의 이름에서 따왔다. 버그내 순례길이 정비된 후 다른 지역에도 순례길 조성 사업이 시작됐다.

신리성지의 김동겸 신부는 버그내 순례길의 기본 코스가 솔뫼성지부터 신리성지까지이지만, 일부는 공세리 성당부터 해미읍성까지를 순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날은 솔뫼성지부터 걷기 시작했다. 물고기모양 안에 `ㅂㄱㄴㅅㄹㄱ`이라 쓰인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중간마다 설치된 이정표는 성지의 방향과 남은 거리가 표시돼 있다. 순례길이 생각보다 길기 때문에 물이나 음료를 챙기면 좋다. 편한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는 것을 권한다.

"거기 좀 비켜봐!"

아시아 청년대회가 열릴 솔뫼성지는 공사가 한창이다. 입구 주변 도로에 아스팔트를 새로 깔고 버스가 들어 설 주차장을 만드는 작업 때문에 인부들은 구슬땀을 흘렸다. 성지 주차장 옆에는 거대한 천막이 위용을 뽐냈다. 아시아 청년대회를 진행할 공간이다. 평일이었지만 성체 조배를 하는 신자, 성지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족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의 `솔뫼`.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다. 김 신부는 1784년 천주교가 한국에 전파된 이후 61년 만의 첫 사제였다. 성지 내부에는 `대건당`이라는 집이 있다. 그의 생가를 복원한 것이다. 성지 중심의 배 모양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서해를 건널 때 타던 `라파엘 호`를 형상화 했다. 둥근 모양의 광장은 `솔뫼 아레나`라고 불린다. 그 둘레에 12사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모든 이가 복음의 전파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의미다.

성지 밖에서 보일 정도로 키가 큰 십자가 예수상은 성지의 상징이다. 돌무덤 위에 세워진 상 주변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걸음을 멈추고 예수를 바라본다. 순례객들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다. 잠시 상 앞에 멈춰선 이들은 성지 곳곳에 세워진 예수의 마지막 장면을 형상화 한 조형물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지를 빠져나오면 과수원과 고추밭이 보인다. 사과 특산지 답게 사과 과수원이 많다. 아직 영글지 않아 녹빛을 띠고 있었지만 탐스러운 모양새다. 굽었던 허리를 펴며 고추밭에서 일어나는 할머니가 반갑게 웃어 준다.

솔뫼성지에서 합덕성당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여분. 길가에 세워진 순례길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중 하나인 `합덕방죽`이 있다. 합덕제, 연호제라고도 불리는 합덕방죽은 이름처럼 연잎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합덕제는 후백제 견훤이 둔전을 개간하고 1만 2000명의 병사를 주둔시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방죽 주변을 둘러싼 둑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김제의 `벽골제`처럼 백제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김성태 합덕성당 신부는 합덕성당 뒤 둑길이 충남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도로가 뚫리기 이전 신리성지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둑길은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가 스스로 순교를 선택한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따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걸었던 길이라 기록돼 있다. 합덕방죽을 둘러싼 둑길은 연꽃이 핀 아름다운 길과 죽음을 선택한 오메트르 신부가 걷던 길이라는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다.

지금은 신합덕성당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합덕성당은 여전히 신자들에게 중요한 장소다. 성당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합덕성당의 역사 때문이다. 합덕성당은 아산 공세리 성당과 함께 충청도에 처음 세워진 성당이다. 전신은 퀴를리에 신부가 예산군 고덕면 양촌리에 세운 성당이다. 1899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며 합덕성당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 성당 외부에는 순교 성인들의 유해를 모셨고 순례자를 위한 유스호스텔도 있다.

성당 창문과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오래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인지 바닥은 마루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된다. 순례객들은 없고 누군가 왔다 간 흔적만 남아있었다.

합덕성당부터 신리성지까지는 2시간 정도가 걸린다. 원시장·원시보 형제의 우물터와 무명순교자의 묘를 지나고 나면 끝없는 논길이 펼쳐져 있다. 산이 없는 환경 덕분에 신리성지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볼 수 있다. 신리가 간척지였기 때문이다. 신리는 돈 있는 사람들이 간척사업을 하고 자신이 사는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월경지`였다. 정부의 수탈은 심해도 별다른 규제가 없었기에 신앙생활이 자유로운 환경이었다. 김동겸 신리성지 신부는 신리의 평탄한 지형 덕분에 천주교 박해 이전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관아에서 신자들을 잡으러 올 때 멀리서 직접 보고 몸을 숨길 수 있어서다.

신리성지는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교우촌 중에서 가장 큰 곳이다. 조선의 카타콤바(박해 피난처로 사용된 그리스도인들의 지하무덤)라고 불리는 신리는 마을 사람 400여명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고 기록돼 있다. 반대로 이 때문에 천주교 박해시절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다. 박해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죽거나 마을을 떠났다. 순례길 코스에 있는 무명순교자의 묘가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본격적으로 성지 조성이 시작된 것은 1927년 합덕성당 신부가 복원 전의 초가집을 사면서부터다. 집 주인이 주변 땅 300여㎡(약 100평)를 함께 기증하며 `신리공소`가 된다. 2006년 지금 모습으로 생가터를 복원했고 2007년 성당과 사제관을 지었다. 성지에는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 위앵 마르티노 신부, 황석두 루가, 손자선 토마스를 기리는 기념 성당이 있다. 야외 광장에는 이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경당, 조형물, 연못, 다블뤼 주교 기념관 등이 있다.

글=전희진 기자·사진=최신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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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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