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구실의 PC에서 내 흔적을 지우고 있다. 8월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연구와 강의에 관련된 과거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지우는 중이다. 이 와중에 오히려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 며칠 전 '정년축하 산행'이라는 이름으로 후배 교수들과 함께 경남 고성의 연화산을 등반했다. 연화산은 해발 500여m의 6개의 봉우리가 옥천사라는 천 년 고찰을 가운데 소담하게 품고 있는, 소나무가 울창한 연꽃 모양의 산이다. 내가 태어나 자라면서 땔나무 하러 다니던 뒷산이라 더욱 감회가 깊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라는 동해면 해안 도로를 따라가면서 공룡 발자국을 더듬었다. 고성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신비의 '공룡나라' 그 자체이다. 1982년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이후, 고성의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공룡들의 발자국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알려진 숫자만 자그마치 5000여 개이다. 공룡 발자국을 탐색하러 작은 동네 해변에 들렀다가 나올 때, 우리 일행들의 뒤로 우리들의 발자국 또한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발자국은 누군가 걸어갔던 과거의 흔적이요, 기록이다. 공룡들 스스로 무심코 남긴 발자국이 그들의 존재와 삶의 흔적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6500만 년 전 소행성과의 충돌로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들이 멸종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아주 오래전 멸종한 공룡들의 존재는, 그들의 발자국 화석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공룡이 걸어 다닌 진흙 위에 퇴적물들이 쌓여 진흙이 퇴적암의 바위가 되고, 그 바위가 다시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거치며 발자국 위의 퇴적물들이 씻겨 내렸다. 수천만 년을 지나 공룡 발자국은 새겨진 그대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총리 후보자와 어느 장관의 행적이 공룡 발자국을 탐사하던 중 이야깃거리로 등장했다. 공룡 발자국처럼 사람 역시 살아온 대로 그 흔적이 남는다는 거였다. 태곳적에 깊이 묻혔던 공룡 발자국이 빗물과 바닷물에 씻기고 씻겨 그 존재를 드러내듯이, 총리 후보자나 여러 장관 후보자들의 언행도 세간의 화제로 재조명되고 회자되면서 결국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의견들이었다. 당사자들이야 자신들의 욕심과 행적이 세상에 다시 드러나 곤욕을 치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소리 없이 새겨지는 발자국이란 그런 것이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경영비리와 관피아·해피아 문제가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재조명되면서 마치 공룡 발자국처럼 세상에 하나하나 드러났다. 세월호 구조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멸종해버린 수천만 년 전 공룡들의 발자국도 바위에 새겨져 드러나는데, 하늘 아래 어느 진실인들 감추어질 수 있겠는가.

연화산 옥천사 입구에 "세월호 사고 실종자 무사 귀환과 희생자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70여 일 동안 그 자리에 걸려 있었을 글귀가 우리 일행들 저마다의 가슴에 다시 발자국을 남겼다. 세월호의 기구하고 아픈 사연들은 공룡 발자국처럼 국민들의 뇌리 속 깊이 각인되어 있으리라.

더욱이 나라의 주요 기관에서 국사를 수행하려는 사람들은 공룡 발자국의 교훈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장관이나 총리 등 국가의 책임 있는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언행은 바닷가 바위에 새겨진 공룡 발자국 그 자체이다. 들고 나는 바닷물에 간단히 씻기어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궤적과 흔적이 낱낱이 여러 행태로 남아 있어, 그 사람들의 도덕성과 인격을 재조명하고 검증할 수 있는 증거로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연구실 PC에서 옛 흔적을 열심히 지우고 있지만, 과거 내가 했던 말과 글들이 어딘가에 숱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가급적 좋은 추억과 유익한 내용만 기록과 기억으로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후배 교수들과의 고향 마을 연화산 정년기념 산행은 '공룡 발자국'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얻게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족적을 남긴다. 우리 모두 후대인들이 찾아보려고 하는 공룡 발자국,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공룡 발자국만 남기도록 노력하면 좋겠다.

이규금 목원대학교 금융보험 부동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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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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