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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첫 복음전파 유서 깊은 신앙공동체

2014-06-26기사 편집 2014-06-26 06: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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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천주교 성지를 찾아 13 예산 여사울 성지·배나드리 교우촌

첨부사진1내포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복음을 전파한 이존창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여사울 성지 내 기념비와 제대.

◇여사울 성지=여사울 성지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세례명 : 루도비코 곤자가·1759-1801)의 생가터를 뜻한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존창이 갖는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적 의미는 상당하다.

집안에서도 다수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배출됐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기록된 김대건과 뒤를 이어 두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이다. 이존창 맏형의 딸은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이며 또 다른 조카의 딸은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가 된다.

김대건·최양업 신부 모두 이존창으로부터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다. 조선 천주교 초기에 각 지역별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교리가 퍼져나갔으며 신앙공동체는 대부분 친족과 이웃주민들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 1850년대에 이르러 전국 천주교 신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포지역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복음을 전파한 이존창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내포천주교 첫 복음 터임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이 여사울 성지에 세워져 있으며 그 맞은 편에는 고딕풍의 성당이 설립돼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존창은 서울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창성멤버로 불리는 권일신(세례명 : 프란시스 자비에르·1742-1791)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리를 배우는 등 본격적인 천주교인의 길을 걷게 된다.

천주교 초기인 1784년 세례를 받은 후 가성직 신부로 임명돼 복음전파에 힘썼다. 가성직제는 평신도를 신부로 임명, 전교활동과 함께 성사를 집전토록하는 것으로 천주교리에는 어긋난 것이었다. 후에 이존창은 가성직 신부로서 마음대로 성사를 집전한 일에 대해 반성했다. 세례를 받고 즉시 서울에서 내포로 내려온 그는 전교활동을 벌임과 동시에 1785년 '여사울 신앙 공동체' 즉 내포 천주교회를 설립했다. 이 기간 예산과 보령, 내포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입교활동이 활발히 전개됐으며 김대건·최양선 신부의 친인척들이 천주교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와 관련해 제5대 조선 천주교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는 "내포 지방 공동체는 조선 천주교회에 큰 광채를 보이며 천주교의 못자리가 되었고, 매우 유명한 순교자들을 배출했다"고 찬사를 보내게 된다.

훗날 여사울에서는 성인 홍병주·영주 형제 2위와 복자 9위, 순교자 12위가 나왔으며 오는 8월 교황 방문시 진행되는 124위 시복식에도 6위가 포함되는 등 다수의 천주교 인물을 배출했다.

이존창은 1791년 신해박해 당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기록에 따르면 이존창은 당시 고문에 못이겨 배교한 후 풀려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다블뤼 주교는 "루도비코는 1791년에 배교하긴 했지만, 다시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고 새로 예비 신자의 수를 늘리는 데 힘썼다"고 묘사하며 한순간의 실수를 너그러이 인정해줬다. 실제로도 이존창은 지속적인 입교활동을 벌였으며 1795년 다시 체포돼 옥살이를 하는 등 수차례 고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윽고 1801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여사울 신앙 공동체는 내포 천주교회의 발상지가 되면서 박해의 중심지가 됐다.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에 이어 1839년 기해박해 등 수난의 역사가 계속됐다. 특이한 점은 일부 공동체의 경우 박해가 집중되면 남은 신자들은 위협을 피해 흩어지거나 이주하면서 와해되는 일이 많았지만 여사울은 그렇지 않았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 시기에도 여전히 순교자들이 발생하는 등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다. 내포출신으로 여사울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체포돼 수원과 공주 등지로 끌려가 순교하거나 타 지역에서 여사울로 이주해 살다가 체포돼 순교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존창이 여사울 성지에서 내포 천주교회를 설립한 후 그의 유지는 꾸준히 이어져온 것이다.

◇배나드리 교우촌=예산군 삽교읍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인근 삽교천가에 위치해 과거 홍수가 나면 마을 주변이 모두 물바다로 변해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는 의미에서 '배나드리'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같은 지형적 특성으로 폐쇄성이 높아 박해시기 피난을 다니던 신자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교우촌의 정확한 형성시기와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박해의 일부 기록은 남아있다. 1817년 10월 해미지역의 군사들이 배나드리로 들이닥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간 것이다. 당시 체포된 인원은 30여명 가량으로 이중 민첨지와 형수 안나, 송첨지, 손연옥, 민숙간 등은 모진 고문과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다가 결국 옥사로 순교했다. 또 손역옥의 부친 손여심도 오랜기간 옥살이 중 10년 후 병으로 사망했다.

이들 외에도 배나드리 신자 20여 명가량이 함께 체포돼 왔지만 대부분 형벌에 못이겨 배교하고 석방됐다. 이들은 석방된 후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으며 그 결과 배나드리 교우촌이 사라지는 결과가 초래됐다.

배나드리 교우촌은 짧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삽교지역 최초의 순교자인 인언민을 배출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양반집안 출신으로 서울에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내려와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벌였다. 그는 빈민 구제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바쳐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했다.

이후 공주로 이주해 입교활동을 벌이던 중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됐지만 당당히 신자임을 밝히고 순교를 각오한다. 이 과정에서 공주와 청주, 해미 등의 옥을 돌며 수 많은 형벌과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돌에 맞아 온몸의 뼈가 부서져 순교하게 된다. 이때 인언민은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목숨을 바치는 거야"라고 여러 차례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교우촌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지만 터는 대부분 마을 주민들의 집들이 들어서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글·사진=김석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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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여사울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