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천주교 성지를 찾아 11 당진 신평원머리성지·황무실성지

당진 신평원머리성지는 모진 핍박 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낸 박태진·선진 등 순교자들의 희생정신이 오롯이 살아숨쉬는 충청의 천주교 성지이다. 2000년 4월 4일 신평원머리성지 성전 신축 당시 순교자 묘역. 사진=천주교대전교구 제공
당진 신평원머리성지는 모진 핍박 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낸 박태진·선진 등 순교자들의 희생정신이 오롯이 살아숨쉬는 충청의 천주교 성지이다. 2000년 4월 4일 신평원머리성지 성전 신축 당시 순교자 묘역. 사진=천주교대전교구 제공
◇신평원머리성지=신평 성지는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평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3㎞ 정도 떨어진 곳으로 과거 지명은 원머리이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머리가 변형된 것이며 염전과 농사를 주로 하며 살던 박씨, 양씨, 조씨, 문씨 등이 신앙을 받아들여 병인박해 때는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으로 성장하였다.

마침내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 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지금 한정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태진(마티아)과 박선진(마르코)은 무진년(1868년) 수원 감옥에서 순교한 분이다.

순교자 박선진(마르코)의 아우 박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길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 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 사촌 형 마티아와 함께 수원옥에 갇혔다."

모진 고문을 당할 때 마티아가 이를 못 이겨 배교하려 하자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형을 깨우쳐, 이에 마티아는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옥에 갇힌 지 15일 후 같이 순교하였는데 죽은 후 시체를 찾아 이 곳 원머리에 안장하였다. 이 때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그 후 박선진(마르코)과 박태진(마티아)의 묘는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고 현양비를 세웠다.

이외에도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원머리(신평)출신 14분 순교자들의 기록을 치명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양 도미니코 회장, 박 회장, 유서방, 김동 4인은 정묘년(1867년)에 홍성(홍주) 감옥에서 순교하였으며, 최 베드로, 김 루치아, 김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 4인은 무진년에 홍주에서 같이 순교하였으며, 원씨, 김 마리아 2인이 홍주에서 정묘년에 순교하였고, 최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닐라, 양정수, 양 아우구스티노 4인이 병인년(1866년)에 홍주에서 순교하여 치명 했으니 이 곳 원머리에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순교자들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후 2000년 성전을 신축하면서 재정비 했다가 2009년 교구 성지 위원회의 결정과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의 재가를 얻어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그해 11월 3일 본래 모셔져 있던 원머리로 유해를 옮겨 모시고 현양비도 수정하여 세우고 재정비 하였다. 신평원머리성지내에도 20 여년 간 모셔져 있던 자리에 기념비가 건립되어 순교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황무실성지=1791년 윤지충의 진산사건으로 촉발된 `신해박해` 이전부터 1868년 5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파묘 사건으로 촉발돼 내포에서 2000여 명에 가까운 신자가 해미 등지에서 순교한 `무진박해`까지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던 곳이다.

`황무실`은 달레 교회사나 관변문서에서 소위 `덕산` 또는 `홍주` 등으로 표기 돼 있다. 박해시대에 황무실은 홍주목 덕산현 관할지로 면천군과 범천면(솔뫼)과 인접해 있었다. 사리 때 바닷물이 만수가 되어 삽교천 구만포까지 배가 올라 올 수 있을 때는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배로 아산만과 서해를 거쳐 한강을 통해 서울 서강까지 왕래하였다.

하지만 조금 때 바닷물이 삽교천에 적게 들어오면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황무실을 거쳐 현재 삽교천 방조제에 인접한 남원포까지 걸어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서울을 오갔다. 그래서 황무실은 한양 교우들의 소식을 전해 듣기 쉬운 길목이었다.

황무실은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 중의 하나로 황무실 인근에서 살다 1793년 1월 28일 홍주옥에서 동사형(凍死刑)으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 1799년에 홍주 형장에서 참수 순교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은 장렬한 순교를 통해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에 영적 영감과 감화를 주었다.

그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무진박해(1868년) 등 내포 전역을 휩쓴 무서운 박해 중에도 황무실 신앙 공동체는 계속 보존됐다. 1852년 조선에 잠입한 성 김대건 신부의 스승인 메스트르 신부는 1853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1856년 새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으며 고아사업과 배론 신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충청도 내포 황무실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맡아 사목 하다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덕산 황무실에 묻혔다.

조선교구 4대 교구장 장 베르뇌 주교는 조선 교회를 8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그 중 충청도 홍주 지방을 `성모성탄` 공동체로 지명해 1857년에 조선교구 부주교로 임명된 다블뤼 주교에게 맡겼다. 1861년 조선 입국에 성공한 홍 랑드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로부터 충청도 내포지방으로 파견되어 한수 이남을 관할하던 다블뤼 주교의 명령에 따라 황무실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활동 중 1863년 봄 중병을 얻어 9월 16일 충청도 황무실에서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다.

이 같은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가 있던 황무실 사적지는 1970년 5월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성당으로 이장하면서 교우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돌보지 않는 사적지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성물(십자고상, 묵주)을 간직한 무명의 순교자 또는 신자들의 묘지들이 사적지를 지키고 있다. 최신웅 기자

도움말=천주교 대전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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