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로고

성모신심 발상지·순교성인의 뜻 남아

2014-05-15기사 편집 2014-05-15 06:28:36

대전일보 > 기획 > 종합

  • 페이스북
  • 구글 플러스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블로그
  • 네이버밴드
  • 폴라로
  • 핀터레스트

충청의 천주교 성지를 찾아 10 공주 수리치골 성지·부여 지석리 성지

첨부사진1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에서 성모성심회를 창립했다. 사진은 공주 수리치골 성지에 자리한 게쎄마니 예수상. 사진=공주시 제공

◇공주 수리치골 성지=수리치골 성지는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성모신심의 발상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45년 8월 17일에 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3대 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그 이듬해 1846년 10월에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하던 중에 김대건 신부가 1년도 채 안돼 1846년 9월 16일 순교하고 김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활동을 중지하고 이곳 수리치골에 은거하게 된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돼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 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에서 성모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됐다.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해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신자들은 이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됐다.

한국천주교회가 설립 200주년을 맞이하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가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내 잡지 등에서도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그곳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성모성심회는 성모공경을 주로 하는 신심 단체이지만 죄인의 회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선교 단체의 성격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단체가 설립된 시기가 박해 시기이고, 또 선교사들이 교회의 재건을 위해 조직했다는 사실은 성모성심회가 단지 순수한 신심단체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를 집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부여 지석리 성지=충남 부여읍에서 서천 방면으로 4번 국도를 따르다 보면 홍산면 소재지에 이른다. 여기서 좌측으로 난 613번 지방도를 따라 3.4㎞쯤 가면 일흥 주유소가 있는 삼거리가 된다. 여기서 충화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2.8㎞ 지점 길 좌측에 지석묘가 있다. 지석리는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손선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으로 두 순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다.

△성 손선지 베드로=손선지는 성운 이라고도 하는데 1820년 아버지 손달원과 어머니 임 세실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세를 받고 아버지 밑에서 직접 교리교육을 받으며 신심을 키워나갔다. 1837년 17세의 나이로 샤스땅 정 신부로부터 전교회장으로 임명돼 활동했으며 김 루시아와 결혼 후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충남 진잠 장안리로 피신해 살던 중 장남 손순화 요한을 낳았다. 그 후 전라도로 이주해 여러 곳을 배회하다 이곳으로 온 후 전교회장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집은 공소로 사용됐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전주 감영에서 나온 포교들에게 잡힌 그는 단호히 배교를 거절했다. 12월 13일 숲정이에서 사형이 집행돼 47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일명 기식이라고도 하며 1801년 충남 임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고을 원님을 지낸 바 있는데 손선지의 영향으로 입교 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동향인인 손선지가 이주해 살고 있던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했다. 그는 학식이 많고 신앙심이 깊어 외교인과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고 수계 생활을 도와 주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년 가을,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의 손길이 그가 살던 신리골에도 뻗쳐오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5일 저녁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신리골에 담배를 사러 상인들이 출입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주 진영의 포교들이 담배상인으로 가장하고 정문호의 집으로 들이닥쳐 압송을 한다. 이곳에는 앞서 잡혀온 조화서, 조윤호 부자와 이명서, 정원지 등의신자들도 있었다. 노구의 정문호는 3차에 걸쳐 심문을 받는 동안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치명하자는 조화서의 권고와 격려를 받고 마음을 바로 잡아 치명키로 결심했다. 12월 13일 그는 65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이곳에는 아직도 손선지의 종씨들이 비신자로 살고 있는데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 성인의 시성비라도 세워 달라고 혼산 성당에 밭을 기증해 그 자리에 두 성인의 뜻을 기리는 시성비가 세워져 있다. 최신웅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첨부사진2부여 지석리 성지의 시성비. 최신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