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6) 수기 주지의 아름다운 인연

고려조 최고의 문인 이규보는 수기 주지의 평생지우로 불교와 문학을 함께한 정신적 동료였다.
고려조 최고의 문인 이규보는 수기 주지의 평생지우로 불교와 문학을 함께한 정신적 동료였다.
넓은 안목으로 무엇을 관찰하는가

海眼光中什마觀

대사에게 물어도 대답이 없으니 묻기도

어렵네

問師無對問還難

갑자기 웃고 동산의 고사를 말하니

俄然笑指東山語

책상 위의 능엄경 이미 보지도 않네

案上楞嚴已不看

고려 최고의 문인으로 손꼽히는 이규보가 쓴 시의 한 부분이다. 여기에 나오는 승통이 바로 개태사 수기 주지스님이다. 수기와 이규보는 어렸을 때 함께 글을 배웠고 평생을 함께 한 지우였다. 이규보는 늘그막에 수기의 권유로 능엄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궁금한 것을 묻자 수기는 이심전심, 언어도단의 선문답으로 깨우쳐주고 있다.

수기는 방대한 고려대장경 제작을 주도한 당대의 지식인이요 석학이었다. 이러한 고수와 선문답을 주고받은 이규보 역시 높은 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규보는 유학에 기반을 둔 고위관료였지만 불교에도 상당한 경지를 보여줬다. 고려사회를 풍미했던 거사불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고려대장경 조성이라는 국가 대사에도 수기와 이규보는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1237년 재조대장경 판각을 시작할 때에 이규보가 고종의 명을 받아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지은 것이다. 이 글에서 이규보는 제불성현 삼십삼천의 신통한 힘으로 오랑캐를 물리치고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수기 스님이 대장경 제작을 주도했다면, 평생의 지우인 이규보는 국가적 대역사의 취지를 담은 문장을 완성한 것이다.

이규보는 개태사의 태조 왕건 진전에 올리는 글도 지었다. 그는 1202년 경상도 동경(경주)와 운문(청도)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에 자원했다. 이때 `개태사조전원문`을 지어 천지신명의 힘으로 반역의 무리를 섬멸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개태사 주지 수기가 당대 불교계의 석학이고 교종 5개 종파를 총괄하는 5교도승통이었고, 이규보는 `동방 최고의 시인` `고려 500년 문학의 정수` `고려 제일의 문장가` `동국의 대문호` `동방의 시성` 등 고려시대 가장 빼어난 문인으로 손꼽힌다. 당대의 승려와 문인의 아름다운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수기와 강골 지식인 유승단의 관계도 흥미롭다. 유승단은 무인정권시대 보기 드물게 자기 목소리를 낸 문신이다. 1232년 최이가 강화천도를 논의할 때 모두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하는데 오직 유승단만 반대했다.

유승단은 승선과를 주관했는데 이때 수기를 장원으로 뽑았다. 유승단은 수기 스님을 혈육처럼 보살폈고 죽기 직전 수기에게 뒷일을 부탁할 정도였다.

유승단이 죽었을 때 이규보가 쓴 `제유승상문`이 전하는 데 수기 스님이 부득이한 일로 제문을 쓰지 못하자 이규보가 대신 쓴 것이다. 이규보가 수기와 유승단의 관계를 잘 알기 때문에 대신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승단은 아들이 없었고 그 때문에 수기에게 후사를 부탁한 것이다. 수기 주지와 천기, 균여의 관계도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라 의상대사에서 비롯된 화엄학의 큰 흐름이 균여를 거쳐 개태사를 인연으로 하여 수기와 천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려의 국교인 불교는 상당 기간 동안 화엄종이 흐름을 주도했지만 속내는 복잡했다. 신라 말 해인사에 화엄종의 종장인 희랑과 관혜가 있었는데, 희랑은 고려의 왕건, 관혜는 후백제 견훤을 지지했다. 이들은 통일 후 북악파와 악파로 나뉘어 갈등을 거듭했다. 고려초 화엄종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균여였다. 균여는 북악의 융회불교의 입장에서 남악의 사상을 통합하려 했고, 법상종까지 흡수하기 위하여 성상융회사상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균여의 노력은 11세기 의천에 의해 배척당한다.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법상종 등 교종의 종파를 융합하고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까지 통합을 시도했다. 송나라로 구법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국내는 물론 송, 거란, 일본에서도 불서를 수집하여 1010부 4740권의 초조대장경을 조성했다. 그러나 의천은 이 대장경에 균여의 저술들을 한편도 싣지 않았다.

화엄종단은 무신정권기 고려대장경 조성 과정에서 큰 변화를 겪는다. 의상에서 균여로 이어져온 북악파 법맥이 개태사를 중심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중심에 선 인물은 개태사 주지 수기와 동시대 승려 천기스님이다. 고려대장경 보유판에는 균여의 석화엄교분원통초, 석화엄지귀장원통초, 십구장원통기, 화엄삼보장원통기, 일승법계도원통기 등이 판각되어 전한다. 원통은 균여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 저술은 균여가 생전에 화엄의 교리를 해설하고 풀이한 것들이다. 균여의 저술은 당대 승려들에 의해 기록돼 화엄도량인 개태사, 법수사(성주), 갑사(계룡산) 등에 전했다.

이들 균여의 저술을 찾아낸 사람이 수기와 천기 스님이다. 경판을 조성하기 위해 준비할 무렵 천기는 수기스님과 함께 개태사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천기는 흥왕사 교학의 강주이자 해인사 주지 신분이라 여러 화엄 사찰을 드나들 수 있었다. 천기는 1226년에서 1234년 사이 균여의 저술을 개태사와 갑사 등의 고장(古藏)에서 찾아내 보완했다. 방언(향찰) 부분을 삭제하여 논란의 소지를 없앤 것이다. 이러한 천기의 노력이 후대의 승려들에 의해 보완되고 완성돼 고려대장경에 실린 것이다.

균여의 저술이 개태사에서 많이 남아있던 것도 흥미롭다. 태조의 진영이 봉안된 진전사찰로 내내 국가적 지원이 끊이지 않았던 덕분이다. 고승 대덕이 주지로 있었고 당대의 학승들이 이곳에서 설법을 했으며 그 말씀도 정리되어 보존됐던 것이다. 개태사는 대장경 조성을 주도한 수기 주지를 끈으로 고려 최고의 문인 이규보, 강직한 지식인 유승단과 인연이 닿아있다. 특히 수기 주지와 천기스님의 노력 덕분에 균여대사의 저술이 오늘날까지 전하게 된 것은 개태사의 큰 음덕이 아닐 수 없다. 김재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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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는 태조왕건의 진영을 봉안한 진전사찰로 고려대장경 제작을 주도한 수기승통을 비롯 당대의 고승대덕이 주지하며 고려시대 불교종단을 주도했다. 개태사지 발굴 현장의 잘 다듬어진 장대석이 당시 사찰의 면모를 짐작케 한다.  장길문 기자
개태사는 태조왕건의 진영을 봉안한 진전사찰로 고려대장경 제작을 주도한 수기승통을 비롯 당대의 고승대덕이 주지하며 고려시대 불교종단을 주도했다. 개태사지 발굴 현장의 잘 다듬어진 장대석이 당시 사찰의 면모를 짐작케 한다. 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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