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개태사 역사탐방 (5) 수기 주지와 고려대장경

대장경 제작을 위한 자료 수집과 교감 과정을 정리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맨 앞 면에는 사문 수기 등 봉칙 교감이라고 적혀있다.  사진=서울대규장각
대장경 제작을 위한 자료 수집과 교감 과정을 정리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맨 앞 면에는 사문 수기 등 봉칙 교감이라고 적혀있다. 사진=서울대규장각
◇에라스무스보다 탁월한 문헌학자="대장경의 문헌적 가치를 비교할 때, 책임자인 수기스님은 서양의 에라스무스보다 더 탁월하다."

지난해 9월 서울에서 열린 고려대장경 국제심포지엄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아대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발언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이 왜 경이롭고 위대한가? 왜 세계의 종교계는 물론 지성계가 경탄할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일까?

12-13세기 고려는 역사상 길이 남을 대역사(大役事)를 벌였다. 2차례에 걸쳐 불교에 관한 모든 서적을 정리하여 목판에 새기고 이를 인쇄하는 일을 전개했다. 동아시아 불교계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다. 고려대장경 제작의 중심에 선 인물이 개태사 주지 수기스님이다. 제작 과정을 정리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은 베일에 싸여있던 여러 가지 비밀을 푸는 중요한 단서다. 교정별록의 머리에는 `사문 수기 등 봉칙교감`이라고 적혀있다. 수기스님 등이 왕의 칙령을 받들어 대장경을 교감(校勘)하고 편찬했다는 것이다. 교정별록 30권에 대해 `해동 사문 수기편`이라며 수기스님이 편집·편찬·편수했다고 적혀있다.

최자의 `보한집`에는 "개태사 승통인 수기는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이 정밀하여 왕의 칙령을 받아 대장경의 정오를 교정하였는데, 평소에도 직접 번역하였다. 현재는 오교도승통이다"라고 나와 있다. 수기 스님의 직책 오교도승통은 교종 5개 종파의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화엄종 대표한 개태사 주지 수기=수기는 어떤 사람이고 왜 그가 재조대장경 조성의 중심에 섰을까? 수기의 생애를 담은 공식적인 기록은 없고 이규보의 시에 간략하게 남아있다, 이규보에 따르면 수기는 이규보의 처가인 진양 진씨(晉氏) 집안 사람이었다. 이규보가 어렸을 때 장인의 집에서 자주 만났다고 한다. 이규보의 장인은 대부경 진승이었다. 당시 혼인은 결혼식을 처가에서 하고 남편이 일정 기간 처가살이를 했다. 수기는 이규보가 처가살이를 할 때 그 집에서 자주 만났고 함께 공부도 했다.

수기는 출가하여 승려가 됐고 승과(僧科)에 합격했다. 이때 시험을 주관한 인물이 유승단으로 그는 수기를 으뜸으로 선발했다. 유승단은 당대의 대학자로 불경과 역사·고문 등에 정통했으며 고종이 어렸을 때 스승이었다.

수기는 승려로서 수신과 공부를 열심히 하여 화엄종의 대표적인 승려로 발돋움했다. 개태사 등의 주지를 지내며 불교계 전체의 존경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수기가 재조대장경의 중책을 맡게 된 것은 무인정권과 기존 불교계의 대립·긴장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무인정권은 고려 개국 이래 불교계 주류 역할을 해온 교종과 적대적인 관계에 처해 있었다. 왕실과 문벌귀족, 불교계의 반발은 최씨 정권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최충헌 암살을 시도하는 등 수시로 무인정권을 위협했다.

무신들은 불교를 등지고서는 정권유지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적대적인 교종 대신 선종에 손을 내밀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이는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며 적극적으로 불교계의 새로운 세력을 끌어 들였다.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인식하고 자기반성과 개혁을 시작한 인물이 선종의 지눌이었다. 무인정권은 지눌의 수선결사가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되자 지눌을 적극 지원한다.

◇무신정권의 불교계 개편작업=교종도 전반적인 세력교체가 이뤄진다. 최이가 집권하면서 화엄종은 의천 직계인 흥왕사 요일과 영통사 각훈 등이 주류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를 균여의 후예들이 차지했다. 개태사의 수기와 천기 등이 화엄종의 주류로 등장한 것이다. 수기는 이런 경로로 무신정부에 의해 중용되어 재조대장경 교감을 총괄했다.

수기는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불교는 물론 시문에도 뛰어난 지성이었다. 고려와 북송, 거란의 경전에 통달했고, 교종과 선종은 물론 성종 이후 중요한 통치이념으로 부상한 유학자들과도 깊이 소통했다. 유연성과 균형감각을 갖춰 당대 동아시아 모든 불교 관련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하는 대업(大業)에 누구보다 적임자였다.

수기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가장 훌륭한 텍스트를 모았고 그것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연구하여 바로잡았다. 13세기 고려사회가 가진 최고 수준의 지적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당대의 저작들을 모아 오늘에 전하게 한 위대한 불교인이요 인문학자인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이 위대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한역(漢譯)된 장경으로 가장 수록 범위가 넓다는 점이다. 북송의 대장경과 거란의 대장경을 비롯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경을 집대성했다. 과학기술과 예술성도 자랑거리다. 7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썩거나 뒤틀리지 않은 채 전해지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나무에 새긴 글씨도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불교사적 서지학적 가치도 크다. 사라진 북송 대장경과 거란판 대장경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여기에는 고려의 귀중한 자료도 담겨있다. 고려대장경이 아니면 동양의 많은 삼장(三藏)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본문의 충실함과 정확함이다. 당대의 모든 불교계 학문적 성과를 모았고 그 내용이 매우 정밀하다. 수기는 여러 바탕 본(本)을 대조하여 틀린 곳, 누락된 곳, 앞뒤가 뒤바뀐 것, 중복된 곳, 오탈자, 문장이 난삽한 곳을 찾아내 바로 잡았다. 부족한 부분은 채웠고, 늘어지거나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곳은 잘라내고 교체했다. 고려대장경은 당대 최고 수준이던 고려 불교계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담겼다. 개태사 주지 수기는 이러한 고려대장경 조성의 핵심이고 정점이었으며, 인류역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을 일궈낸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김재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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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203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六)의 앞면 아래 쪽에는 해동사문 수기장본(海東沙門 守其藏本)이란 묵인(墨印)이 있다. 고려대장경 제작 때 수기가 저본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국보203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六)의 앞면 아래 쪽에는 해동사문 수기장본(海東沙門 守其藏本)이란 묵인(墨印)이 있다. 고려대장경 제작 때 수기가 저본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개태사 주지 수기스님은 당대 최고의 학승이자 지성으로 고려와 북송, 거란의 경전을 모으고 정리하여 고려대장경 제작을 주도했다. 사진은 해인사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전경.
개태사 주지 수기스님은 당대 최고의 학승이자 지성으로 고려와 북송, 거란의 경전을 모으고 정리하여 고려대장경 제작을 주도했다. 사진은 해인사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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