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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박해시대 순교자 마지막 안식처

2014-04-03기사 편집 2014-04-03 06: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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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안 성거산 성지

첨부사진1천안 성거산 성지는 신유·병인 등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한국 천주교사의 밑돌'이 된 성지다. 병인박해 당시 성자들의 비밀 은신처인 '교우촌'에서 체포돼 처형당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안장된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 모습. 사진=성거산 성지 제공

이상 고온으로 거리의 벚꽃들이 예년보다 일찍 만개했다. 바람불면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도 아름답지만 산 속은 겨울을 숨 죽여 지낸 야생화들이 하나 둘 새 싹을 틔우고 있다. 야생화는 혹독한 박해의 시기를 지나 신앙의 시대를 활짝 연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와 닮았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 속에 2012년 한국 천주교회 신자는 536만 1369명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사람 열 명 가운데 한 명은 천주교 신자인 셈이다. 오늘의 한국 천주교를 만드는 데 밑돌이 된 순교자들이 야생화 속에 잠든 성지가 있다. 천안의 성거산 성지이다.



◇박해시대 비밀 교우촌 7개 형성=천안시 북면 납안리 산46-1번지에 자리한 성거산 성지는 박해시 형성된 유서 깊은 교우촌 유적지와 줄무덤 형태의 두 곳 순교자 묘지로 이뤄졌다. 성거산 성지는 경기, 충북, 충남 등 3개 도가 접경한 곳이다. 한국의 성지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발 579m 차령산맥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산 아래에서 자동차로 출발하면 저단 기어를 넣고 가파른 경사의 도로를 굽이굽이 20여 분 올라야 성지 주차장에 도착한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분주 할 때 직산면 수헐원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동쪽 산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영롱함을 보고 신령이 사는 산이라 하여 거룩할 성(聖)자와 거할 거(居)를 써서 성거산이라는 명칭이 정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성거산에 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거룩함이 머무는 산에 성지가 자리한 것도 묘한 인연이다.

험난한 산세에 변변한 길도 없던 시절,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높이에 성지가 위치한 데에는 아픈 역사가 배어 있다. 성거산 성지와 주변은 신유박해 전후부터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해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유서 깊은 비밀 교우촌이 형성됐다. 천주교 대전교구에 따르면 1801년 신유박해 이후에 형성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과 1830년대에 형성된 서들골(일명 서덜골) 교우촌은 박해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피신처요 은신처였다.

서들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의 큰 아버지인 최영렬씨가 1827년 고향인 청양 다락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의 둘째 동생인 최선정(안드레아)은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성거산 교우촌에서 잠시 성장했다. 2개의 교우촌을 중심으로 병인박해 이후부터 계속 생겨난 교우촌들은 7개까지 늘었다가 1920년 모두 사라졌다. 성거산 교우촌의 이름은 1839년 기해박해 직후부터 교회사의 기록에 등장한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안식처=성거산 성지는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됐다. 한국교회사 연구소의 차기진 박사가 쓴 '천주교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 순교사 연구'에 따르면 병인박해 시기인 1866년 10월(음력)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돼 포졸들이 덮쳤다. 교우촌에 거주하던 신자들은 끌려가 순교했다. 순교자는 소학골 9명, 서들골 4명, 복구정 2명, 베장골 2명, 장자동 4명, 공심리 1명, 목천 1명 모두 23명이나 됐다. 이들은 서울 좌포도청(11명), 공주감영(6명), 청주(2명), 죽산(3명) 등에서 순교했다.

병인년 10월 소학골에서 체포돼 공주 감영에서 순교 한 배문호(베드로)와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나자로), 고요셉과 최씨 며느리 등 5명의 시신은 성거산 성지 제1줄 무덤에 묻혀 있다. 절두산 성당에 소장된 병인박해 치명 일기에 기록된 소학골 출신 순교자들의 신앙생활과 옥중생활을 보면 최천여는 포졸들에게 끌려간 관청에서 천주학을 배반하도록 권유를 당했다. 말을 듣지 않자 다시 투옥돼 갖은 고문과 박해를 당했다. 심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교우들을 찾아 다니면서 '금세는 잠깐이요 후세의 세계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 살기 위해 배반하느냐'며 눈물을 흘리며 설득시키다가 당시 나이 52세로 병인년 음력 11월 8일 순교했다.

이 이외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성거산 성지에 이장한 분들의 증언과 순교자 후손들의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성거산 성지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순교자들과 그들이 살았던 교우촌은 오랫동안 오가는 사람 없이 들꽃과 벌, 나비, 짐승들만이 함께했다.

성거산 성지는 선교사들과도 인연이 깊다. 박해시기인 1851년부터 1866년 10월까지 성거산 교우촌을 순방하고 인연을 맺은 이들로 한국인 사제 최양업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 신부, 메스트로 신부, 니콜라 칼래 신부 등이 있다.

특히 칼래 신부는 정주형 교우촌이자 신자 공동체로 형성된 소학골을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했다. 그는 소학골 교우촌을 "독수리 둥지 마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 싸여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여기저기 절경을 찾아 눈앞에 듬뿍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다"고 소개했다. 천안=윤평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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