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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모습속 현대사 아픔 고스란히

2014-03-27기사 편집 2014-03-27 06: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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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천주교 성지를 찾아서] 3 아산 공세리성당

첨부사진1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에 선정된 '아산 공세리성당'은 19-20세기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윤평호 기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신부수업', 드라마 '천국보다 낯선', '아이리스2'의 공통점은? 12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공세리성지·성당(이하 공세리성당)이 나온다. 공세리성당은 아산시 인주면의 너른 들판과 해안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고즈넉히 자리하고 있다. 공세리 성당은 1890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아홉 번째이자 대전교구에서 첫 번째로 설립됐다. 2005년 한국관광공사는 공세리성당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했다. 사계절 다른 모습의 공세리성당은 신도 뿐만 아니라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이다.



◇순교자 32위 모셔진 공세리성당=공세리성당이 위치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는 조선후기까지 충청도 아산현에 속했다. 공세리는 아산현의 현내면과 일서면의 접경 지역인 공세곶에 설치된 공세지곡성(공세곶창)에서 유래됐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공세곶창은 고을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다. 공세곶창은 천안, 부여, 예산, 당진, 온양 등에서 바치는 세금을 대신한 세곡을 저장해 두었다가 한양에 배로 운반했다. 공세리성당 인근에는 지금도 공세곶창 터가 일부 남아 있다.

공세리성당은 내포지방의 입구이다. 내포는 한국천주교회의 신앙의 못자리라 불릴 만큼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중심지이다.

공세리 성당에는 1801-1873년 신유, 병인박해때 순교한 아산 지역 순교자 32위가 모셔진 성지이다. 서른 두 분의 순교자는 단지 하느님을 믿고 공경한다는 이유로 서울, 수원, 공주 등으로 끌려가 고문, 옥사, 참수형 등으로 순교했다.

32위의 순교자에는 아산 최초의 순교자인 하 바르바라도 있다. 박홍갑, 오인악, 박제환(베드로) 등은 당시 불과 18세의 어린나이임에 믿음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광스런 순교의 길을 택했다. 인주면 걸매리 출신의 박의서(사바), 박원서(마르코), 박익서(세례명미상) 등 박씨 삼형제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가족이 시신을 거두어 인주면 맹고개에 이장했다. 박씨 삼형제 순교자들의 유해는 1988년 9월 20일 맹고개에서 성당 경내로 모셔졌다. 1996년 공세리성당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아 박씨 삼형제 순교자 현양비가 공세리성당에 세워졌다. 2007년 11월 20일 야외 제대 뒤편에 순교자 납골식 현양탑이 봉헌됐다.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에는 스물 세 분의 묘석이 모셔져 있다.

공세리성당은 처음에는 소규모의 한옥사가에서 출발했다. 제2대 본당 신부인 에밀 드비즈 신부는 신자가 늘자 주변보다 높은 곳에 한옥식 성당, 사제관, 부속건물을 직접 설계·시공해 1899년 8월 말에 축성식을 했다.

초기 공세리 한옥성당은 사제관과 연결된 'ㅁ'자 평면형이었다. 흙벽과 기와지붕, 마룻바닥의 외관은 외래적이고 이질적인 요소가 첨가되지 않은 순한옥 목조건물의 전형을 보였다. 두번째 전통 한옥성당은 전통한옥의 만남을 통해 한국 성당 건축의 토착화를 시도하려는 드비즈 신부의 노력이 담겼다. 1922년 10월 8일 세 번째 고딕성당이 완공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한국 현대사 아픔 간직한 공세리성당=드비즈 신부는 공세리성당의 건축 뿐만 아니라 교육사업에도 헌신했다. 드비즈 신부는 1905년 본당 내에 서양식 근대 학교인 조성 보통학교를 설립했다. 45명의 아이들에게 글과 교리를 가르쳤다. 1909년부터는 신자가 아닌 자녀들에게도 교육 기회를 확대했다. 파리외방 전교회에서 나온 '한국천주교회'와 리델 주교의 주관으로 편찬된 '한불자전'을 교재로 사용했다. 이 학교를 통해 아산 지역의 교육 사업이 활성화됐다. 오늘날 아산 인주면의 인주 초등학교도 이곳이 전신이다.

공세리성당의 신앙 선조들 중에 이명래(요한)를 빼 놓을 수 없다. 당시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방조제 공사는 공사에 임한 토착민들에게 힘든 노동 이외에도 창상과 욕창, 고름병과 같은 질병의 고통을 안겼다.

드비즈 신부는 구휼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서양의술과 한방기법을 활용해 직접 고약을 만들었다.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 '성일론 고약'이라 명명됐다. 1906년 드비즈 신부는 이명래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했다. 독실한 신자인 이명래는 드비즈 신부를 찾아가 잔심부름을 하며 '성일론 고약'의 제조법과 치료법을 배웠다.

그후 서울 중림동(약현) 성당 언덕에 자리를 잡고 많은 사람들을 치료했다. 당시 일본군 장교 사사키도 이 고약으로 치료를 받고 완치되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그 약효를 기고해 '이명래 고약'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드비즈 신부에서 출발한 이명래 고약은 국내 최초의 양약인 활명수와 함께 가장 오래된 장수 의약품으로 알려졌다.

공세리성당은 한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도 간직하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한 탄압과 수난은 한국 천주 교회사에서 '침묵의 교회 형성기' 또는 '제2의 박해기, 20세기 순교자들의 시대'로 불린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1948년 5월 8일 새 교구로 설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로 절반에 가까운 성직자와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을 잃었다. 그때 순교한 25명의 성직자 중 10명의 신부들은 이른바 공산당에 의해 북으로 압송되는 '죽음의 행진' 과정에서 순교했다. 공세리 성당에서 사목하던 오필도 요셉 신부와 공세리 성당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하지 못한 강달순 카다르 신부도 이 행진에 끌려가 순교했다. 대전교구 첫 번째 방인 신부이자 공세리 성당 출신인 강만수 요셉 신부는 1950년 초 홍성 성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됐지만 안타깝게도 인민군에게 잡혀 대전 목동에서 피살됐다. 아산=윤평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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