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가 지났습니다. 눈이 녹아 물이 되는 시기가 도래하였습니다. 숲 속의 생물들은 햇볕이 길어지는 것으로 때가 왔음을 자각하고, 눈이 녹으며 스며드는 물을 빨아올려 생명의 순환을 시작합니다. 이즈음 언땅이 녹아 푸석거리며 풍겨내는 흙냄새로 눈앞의 봄을 직감하지요.

앉은부채는 이런 봄날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입니다. 도시보다 더디 오는, 이른 봄 숲에, 그래서 기대했던 봄꽃을 만나기엔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 그런 즈음에 한결 부드러워진 대기의 기운을 맞으며 이 산, 저 산,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오르내리면 만나게 되는 꽃이 바로 앉은부채입니다. 이런 앉은부채는 알면 알수록 참 신기한 식물입니다. 우선 꽃모양이 독특한데, 꽃잎이 없는 작은 꽃들이 동그랗게 달리고 그 위로 모자 같기도 하고 보자기 같기도 한, 얼룩 얼룩한 포라고 부르는 부분에 싸여 있는 것도 그렇구요. 꽃이며 꽃이 지고 난 후 돋아나는 풍성한 잎이며 전체적으로 개성 넘치고 멋진 모습이지만, 냄새가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독성이 있다는 점도 특별하지요.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잎은 먹기 좋은 양배추처럼 생겼으나 냄새도 나고 독도 있는 이 꽃을 두고 `스컹크 캐비지(Shunk Cabbage)라고 부른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궁금한 것은 잔설이 녹기 전 이미 그 특별한 꽃송이를 언땅 위로 내어 놓는 그 강력한 힘의 발원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꽃이 필 즈음 앉은부채는 스스로 발열하여 포 속의 온도가 더 높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런 특별한 행태의 저력은 땅속 뿌리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뿌리는 근경은 굵고 짧지만 긴 끈 같은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얼마나 깊이 그리고 멀리 뻗는지 모릅니다. 비록 앉은부채가 봄에 피워낸 꽃차례의 크기는 주먹만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한 모든 에너지를 다하여 가장 부지런히 꽃을 피워 봄날의 햇살을 모두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현호색, 얼레지 등 이른 봄 꽃 피우는 식물들은 뿌리가 튼튼하거나 덩이줄기가 있거나 모두 지난 가을부터 열심히 준비한 식물들이네요. 인생도 먼저 준비한 자가 먼저 기회를 잡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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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 국립수목원 박사
이유미 국립수목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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