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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슈베르트 숭어가 아니라 송어?

2014-02-12 기사
편집 2014-02-12 05:5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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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음악교과서 오역 많아 늦게나마 수정 조치해 다행 개선은 불경·불교사상 근간 모든 잘못된 일 바로잡아야 "

2009년 난생처음 미국 뉴욕 맨해튼이란 곳에 가 보았다. 산골에서 살던 촌스러움을 벗어볼까 클래식 공연이라도 몇 편 들어볼 마음에 카네기홀을 찾았다. 거기서 고교 시절 배웠던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곡 '숭어'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영문으로 편찬된 곡 소개를 읽어 보니 'trout(송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숭어는 바닷고기이고 송어는 민물고기일 텐데 '거울 같은 강물 위에 숭어가 뛰논다'는 가사도 떠올랐다. 바닷고기가 민물에서 뛰논다는 해괴한 가사가 마음에 걸려 교육부에 서신을 넣어 사실관계를 따져 보았다.

뜻밖에 슈베르트의 '숭어'는 '송어'의 오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교육부는 잘못을 시인하고 2011년도부터 음악교과서의 '숭어'를 '송어'로 바꾸겠다고 답변해 주었다.

혹시 '폴포츠'란 좀 못생긴 사람을 기억하실지? 그는 2007년 영국의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를 통해 휴대전화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주목받게 된 사람이다. 그의 평범한 인생을 스타로 변모시킨 그 운명의 노래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명곡 '공주는 잠 못 이루고'였다.

이 곡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곡으로, 칼리프 왕자가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전에는 베이징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아무도 잠들지 말라고 명령하는 매우 카리스마 넘치는 아리아이다. 원제 네숨도르마(nessum dorma) - 아무도 잠들지 말라. 그런데 이 곡을 누가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고 번역한 것인지, 제목만 본다면 마치 사랑에 빠진 공주가 가슴이 떨려서 잠들지 못하는 '사랑의 노래'로 오인될 소지가 다분해 보였다. 교육부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잘못된 번역이란 지적을 받아들여, 조만간 원제목에 충실하게 '아무도 잠들지 말라'라고 음악교과서에 수록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늦었지만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우스꽝스런 고백이지만 최근까지도 독일 작곡가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사탄의 마수'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고교 시절 음악시간 교과서에 실려 있던 '마탄의 사수'란 제목이 너무 생소했고, '마탄의 사수' 서곡이 찬송가 431장('내 주의 뜻대로')으로 쓰인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막연히 '사탄의 마수'가 잘못 인쇄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이유였다. 독일 오페라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던 시기는 아마 일제강점기였고, 일본어로 번역된 용어를 아무 비판 없이 지금까지 사용하다 보니 얼렁뚱땅 뜻 모를 '마탄의 사수'란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는 듯하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나 유럽에 가서 유학하고 돌아와 교수가 되고 교과서 집필진이 되었는데, 왜 저렇게 형편없는 번역을 바로잡지 못했을까 하는 문제이다. 타성에 젖다 보니 무심코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교과서 집필 및 감수를 위해 해마다 일정한 비용을 지급받으면서도 수십 년간 방치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또 굳이 바꿔서 뭐하랴 하는 나태함의 소산이었을지도 모른다.

간혹 사람들이 묻는다. 스님 왜 번역 문제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세요?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번역'이라는 난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언어체계가 다른 인도어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번역'을 통해 '정확한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거의 천년에 걸쳐 고민해왔다. 그 과정에서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훈련이 불경과 불교사상의 곳곳에 세심하게 녹아 있게 되었다. 앞선 선학들의 잘못을 후학들이 바로잡는 '교정과 개선'의 축적이 오늘날 정비된 불경과 불교사상의 근간이 된 것이다.

비슷한 것과 정확한 것은 '호롱불'과 '형광등'의 차이만큼 크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결과적으로 정교한 사유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하물며 교과서에 수록된 잘못됨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교과서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불교는 '파사현정(잘못된 것을 깨뜨리고 올바름을 드러내는 것)'의 연속이다. 세상은 우리의 힘으로 조금씩 좋아질 수 있다.

혜문스님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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