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건강카페 6호점 바리스타 정상미씨

사노라면-당당해서 아름다운 그녀 정상미씨의 희망찾기 사진=강은선 기자
사노라면-당당해서 아름다운 그녀 정상미씨의 희망찾기 사진=강은선 기자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청아한 목소리, 상냥한 억양이 귓가에 꽂힌다.

커피잔을 받으니 서글서글한 눈매가 씨익 웃는다. 그러더니 다시 분주하게 기계에서 에스프레소 샷을 뽑는다. 한 잔, 두 잔…. 커피를 만들면서도 기다리는 손님, 옆 바리스타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쏟아지는 커피 주문에도 짐짓 여유를 부리는 건 정씨만의 스타일이다.

▲ 정상미씨는 장애는 노력과 끈질김으로 장애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희망찾기는 당당함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정씨가 건강카페에서 환히 웃고 있다. 사진=강은선 기자

대전 갈마동 국민생활관 1층에 있는 건강카페 6호점, 바리스타 정상미(31)씨 특유의 쾌활함이 커피에 녹아든다.

커피 잔을 손님에 내어주고 뒤돌아 갈 때 귓가에 꽂힌 보청기가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그가 청각 장애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정씨를 처음 본 이들은 종종 외국에서 살다왔냐고 묻는다. 말 속도는 일반인과 같지만 조금은 어눌한 발음 때문이다.

정씨는 청각장애 5급이다. 5급이면 보통의 대화 소음에 해당하는 60데시벨 이상의 소리를 내야 겨우 들린다. 보청기를 끼지 않으면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는 웅성거림으로 들린다.

유치원에 다니던 6살, 잠깐 앓다가 말겠지 했던 감기가 중이염으로 번지면서 세상의 소리를 앗아 갔다.

한글을 다 떼고 난 후 찾아온 장애였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는 만큼 발음도 무뎌졌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자 소심해졌다.

다른 친구의 말을 유심히 듣다 보면 옆의 친구가 그를 툭툭 치면서 "왜 대답을 안해?" 묻기 일쑤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다른 이들이 웃고나면 그제야 웃는 자신이 씁쓸했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떨어져만 갔다.

▲정상미씨는 장애는 노력과 끈질김으로 장애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희망찾기는 당당함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정씨가 건강카페에서 커피를 직접 내리며 환히 웃고 있다. 사진=강은선 기자

대화에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욕심을 부릴수록 친구들과의 사이는 어긋났다. 정씨는 학교 생활을 하며 `노력`보다 `포기`를 먼저 배웠다.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선을 긋자, `대화`는 그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무엇을 하든 항상 뒤로 빠져 있었고 발표 시간이 되면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혼자만 어울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혼자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았다. `그림 그리기`와 `책 읽기`. 누구에게도 묻지 않아도 되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취미. 그렇게 스스로 벽을 쌓았다.

"걸음이 빠르구나."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 첫날, 한 친구가 뛰어왔다. 정씨에게 먼저 다가와준 친구였다. 친구들과 마음을 터놓고 어울린 건 10살이 돼서였다.

그러면서도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장애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4학년 때부터 보청기를 꼈다. 담임교사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교사가 수업을 하면 입모양을 따라하고 거울을 보면서 발음 연습을 했다.

`ㅅ`, `ㅈ`, `ㅊ` 발음이 비슷한 자음은 여전히 어렵다.

중학교에서는 교사들이 배려해 주곤 했다. 교탁 바로 앞에 앉아 수업을 잘 들을 수 있게 해줬고 주번도 빼 줬다. 하지만 짝을 지어 일주일마다 교실 일을 하는 주번을 안하게 된 것에 섬이 된 기분이었다. 기대 때문에 열심히 해야 했지만 왠지 모를 족쇄처럼 느껴졌다.

"배려해 주는 건 항상 고맙죠. 하지만 제 스스로 다시 저의 장애를 느끼게 해주니까 오히려 그냥 지켜봐 주는 게 더 필요했을 지도 몰라요. 특별하다는 것은 남과 다름임을 그 때 알았던 거죠. 그래서 특별 취급은 싫었어요."

▲ 정상미씨는 장애는 노력과 끈질김으로 장애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희망찾기는 당당함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정씨가 직접 내린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환히 웃고 있다. 사진=강은선 기자

배려는 때론 지나친 참견으로 다가온다. 특별 대우에 친구들의 놀림과 괴롭힘도 왕왕 있었지만 아무일 없는 듯 무던했다. 잘 들리지 않게 되니 남의 이야기에 예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춘기도 그냥 일상처럼 보냈다.

필기를 해야 할 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고 부탁도 서스럼없이 했다. 무던해지니 적극적이고 씩씩해졌다.

만화 그림에 소질이 있던 정씨는 만화과가 있는 중구 부사동의 여고에 진학했다.

봉고차를 타고 30분은 족히 가야했던, 버스로는 2번을 갈아타고 1시간 이상을 가야한 여고 생활이었지만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설렘이 컸던 3년이었다.

하지만 미대 입시는 포기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기에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대신 포기는 빨랐다. 대학교에서는 출판기획을 전공했다. 또래 성향이 강했던 고교와는 다른 대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한 기분,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장애에 가로 막혔다. 복지카드를 받기 위해 장애등급 판정을 신청했다. 부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장애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세월이었던 거 같아요. 스무해 동안 보청기를 끼면서도 조금 덜 들리는 것 뿐이라고 위로했었죠. 사실 장애 등급이 안나오길 기대했어요."

▲ 정상미씨는 장애는 노력과 끈질김으로 장애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희망찾기는 당당함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정씨가 건강카페에서 커피를 건네며 환히 웃고 있다. 사진=강은선 기자

정씨의 지갑에는 주민등록증과 함께 장애인등록증이 꽂혀 있다.

사회에 나오니 청각 장애의 굴레가 그를 옭아맸다.

일반 회사에는 서류조차 통과하기 어려웠다. 직접 서류를 들고 장애인고용센터를 찾았다. 한 신문사에서 편집 업무를 맡았다. 2년 넘게 근무했지만 수 개월간 월급이 나오질 않았다. 경력을 쌓아도 비전이 보이지 않자 그는 그만두고 다시 고용센터를 찾았다. 연락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학창시절 그가 학습한 게 포기였다면 이제는 노력과 끈질김만이 생존이라며 그를 학습시킨다.

정씨는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다.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고 여러 제과전문점을 두드렸다. 생각보다 취업의 문턱은 높았다. 이번엔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은 내 능력을 인정해준다는 거 잖아요. 예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했다면 이젠 사회가 인정해주는 공부를 해야 했어요. 스스로 일어선다는 게 나를 인정하면서부터인 거라는 걸 깨달았죠."

2012년 6월 장애인자활 사회적기업인 `한터`에 들어갔다. 지체장애인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도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회복지사도 공부하고 있다.

"장애가 있는 이들이 제도권에서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가 주는 커피잔을 받아들던 한 주민이 "미소가 참 아름답다"며 인사를 건넨다. 정씨가 곧바로 "예쁘게 봐주시니 기분 좋네요"라며 받아친다. 당당해서 아름다운 그녀, 정상미씨의 희망 찾기는 이제 시작이다.

강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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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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