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부처님께 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대중들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마하 가섭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염화시중, 염화미소다. 이후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왜 부처님께서는 법문 듣기를 청하는 범왕과 대중에게 법을 설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 없이 연꽃을 들어 보이셨을까.

연꽃은 뿌리식물로 진흙탕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꽃대를 물 밖으로 내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연꽃은 이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아니라 진흙탕에 뿌리를 박을 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여기서 더러운 진흙탕은 음모와 배신, 번뇌와 괴로움으로 점철된 이곳 사바세계를 의미하고, 연꽃은 괴로움에 물들지 않고 마음이 활짝 열려 깨달음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연꽃의 뿌리처럼 우리도 탐·진·치와 오욕 그리고 번뇌로 물든 이 세계에 깊게 뿌리를 박고 이를 양분으로 삼되 여기에 물들지 않을 때 비로소 청정한 깨달음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는 우주가 성주괴공한다고 하셨다. 우주가 성주괴공하므로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의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괴로움을 겪으면서 대개 두 가지 방향으로 변한다.

첫째는 세상에 물들어 악인으로 변한다. 배신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에 한을 품고 기회를 엿보다가 복수하여 업을 짓거나 복수할 힘이 없으면 억지로 화를 참으며 가슴에 한을 새긴다. 그래서 한평생을 다 살고 나면 이생에 지은 업과 한이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다음 생에 윤회의 종자가 된다. 그래서 상대방과 끊임없이 원한을 주고받으며 윤회의 수레바퀴에 말려들어간다.

둘째는 세상살이의 괴로움을 겪으면 감당하지 못하고 피하거나 버리고 떠난다. 소극적이고 염세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전쟁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러므로 필요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나머지는 버리고 떠난다.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는 겉으로는 정반대의 태도 같지만 실상은 괴로움의 원인을 나에서 찾지 않고 모두 외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괴로움의 원인을 모두 상대방에게 돌리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원수가 있어서 괴롭고 남이 내게 누명을 씌워서 괴롭고 돈과 권력 때문에 괴롭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연꽃의 가르침을 통해 이런 두 가지 삶의 태도 모두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집착하여 자신의 마음을 악에 물들이는 태도도 잘못이고, 세상을 피하고 떠나서 소극적인 삶을 사는 태도도 소득이 없는 태도라고 가르치신다.

부처님께서는 왜 깨끗하고 안락한 도솔천에서 해탈하지 않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해탈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하늘에서 사람들을 구제하지 않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까.

부처님께서는 연꽃을 들어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마음의 거스름이 없는 천상에서는 마음을 바꿀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다. 안락과 편안함만으로는 마음을 뒤집을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할 때 비로소 나의 좁고 어리석은 인식이 부서지며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논과 밭은 쟁기로 갈아엎지만 마음은 무엇으로 갈아엎을 수 있는가. 마음은 고통으로만 갈아엎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인들이 깨끗한 천상세계가 아니라 더러운 이 세계에 오셔서 이루는 것이다.

유마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높은 육지에서는 연꽃이 피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탕에서만 꽃이 핀다"고 하셨다. 세상살이의 곤란을 피하여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세상살이의 곤란을 당할 때 거기에 빠져 물들지도 말고 거기서 피하여 도망가지도 말고 곤란을 수단으로 자신의 마음을 항복 받으면 우리는 곤란을 통하여 귀중한 지혜와 복덕을 성취하게 된다.

오늘도 원수는 아무런 대가 없이 내 마음을 뒤집어 주고, 돈과 권력은 내 마음속의 탐·진·치를 드러나게 하여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감사할 뿐이다.

김신철 변호사 대승불교양우회 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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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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