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으며 지휘자였고 또한 러시아의 마지막 낭만파 음악 작곡가로서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많은 음악가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들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새로운 음악사조와 작법에 몰두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시도했던 것에 비해 라흐마니노프는 본인의 말대로 그런 유의 음악들을 이해하지도, 또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1873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1943년에 미국에서 타계할 때까지 끝까지 낭만음악의 틀 안에서 주옥같은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라흐마니노프의 이 보칼리제는 원래 성악곡으로 작곡되어 1916년 모스크바에서 소프라노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보칼리제의 뜻은 가사나 계이름 대신 모음만으로 노래하는 곡이란 뜻이다. 아.에.이.오.우 어떤 발음으로 불러도 무방하여 성악으로 많이 불릴 뿐 아니라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피아노, 그리고 오케스트라로도 종종 연주되곤 한다.

성악곡에 가사가 없다는 것은 성악가에게 있어서는 노랫말이 가진 의미 전달이 필요없음으로 해서 한편 단순하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겠으나 사실은 기악곡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흐름과 뉘앙스를 전적으로 음질과 프레이징, 극단적인 셈여림의 표현에 의존해야 하므로 훨씬 고난이도의 성악적인 기술과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래서인지 많은 성악가들이 이 곡을 무대에서 연주함에도 불구하고 녹음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키리 테 카나와(Dame Kiri Te Kanawa)는 긴 호흡과 완벽에 가까운 성악 테크닉으로 이 곡이 가지고 있는 긴 음악적 흐름과 슬픈 서정성을 잘 표현해 내었다.

죠슈아 벨이나 아이작 펄만 같은 바이올리스트들도 이 곡을 연주하였고,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연주도 명연이다. 심지어 이 곡과 잘 어울릴까 싶긴 하지만 피아노 솔로로 된 녹음도 있다. 강철의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을 가진 임마누엘 엑스의 피아노 솔로 연주는 그의 장점이 강렬한 터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애수에 찬 서정성으로 가득차 있어 단 한 번만 들어도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며 라흐마니노프의 다른 작품세계로 쉽게 빠져들게 해 준다. 대전시립교향악단 전임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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