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도예가 5주기 추모' 展 17일부터 11월 17일까지 대전시립미술관

 '잔설의 여운'
'잔설의 여운'
대전시립미술관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작업 속에서 일관되게 관류하는 조선 도자 전통의 맥을 잇고자 했던 故 이종수도예가 5주기를 기념하고 그의 예술 세계를 재조명 하고자 '이종수 5주기 추모'展을 17일부터 11월 17일까지 시립미술관 1, 2, 3 전시실에서 연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작가가 1970년대부터 2008년 타계하기 까지 혼신을 다해 제작한 작품 200여 점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도예에 입문한 1960년대는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근대화를 위한 재건의 기치들이 거리마다 나부끼던 시절 건축공부를 하고자 막연한 생각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 입학한다. 작가가 전통도예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경기도 광주의 가마터에서 그릇을 빚고 구워내던 청초한 경험에서 기인한다. 당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등 전통도예를 재현하여 일본의 미적 취향에 부합하는 그릇들을 생산하여 수출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던 요방(窯房)들의 현실은 아마도 그로 하여금 한국도예의 맥을 부활시켜 현대로 계승시켜야겠다는 열정과 의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30대인 1969년 도에는 충남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가 고려청자의 창조적 계승을 목표로 설립된 이화여자대학교 도예과가 신임 교수로 그를 부르자 고민 끝에 부임한 것이 1976년이었다. 대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창작에 매진하던 그가 서울로 입성하게 된 이 전환기적 사건은 어쩌면 그에게는 전통도예를 더욱 연구할 수 있었던 운명과 같은 역사의 부름이자, 사회적 명예와 경제적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절대적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많은 번뇌와 고민 끝에 결국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사직하고 1979년 대전의 갑천강변 가마가 있는 곳으로 낙향하여 창작에 매진한다.

"세속적인 집착은 순수한 창작정신을 가로막는 사념(邪念)의 온실이며, 도예가의 참된 길을 오도하는 오류의 지도이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저 위대한 도예유산들이 들려주는 역사의 숨결에서 나는 진정한 깨달음의 소리를 언제나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야인의 길로 돌아선 도예가 이종수는 이런 소박했지만 절박했던 사유를 봄날 대지의 새싹처럼 여리지만 올곧게 품고 있었다.

그리고서 내면에서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예술적 성찰에 기대어 속세의 욕망에서 벗어나 선방(禪房)과 같았던 갑천 강가의 가마로 향했던 것이다. 그것은 우둔한 듯 보였지만 위대한 성자(聖者)의 길을 연상시키는 가뭇없는 선택이었고, 결연하게 비움으로써 예술적 여백이 마련되는 것과 같은 '여유(餘裕)로의 탈속적 이행(移行)'이었던 것이다. 이후 이 비움, 여백 혹은 여유의 미학은 이종수의 도예세계를 관류하는 비평적 인식의 출발점이자 형식의 골격을 지탱하는 내용적 뿌리가 된다.

도예가 이종수는 1935년 대전 출생으로,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를 다니던 시절 처음 도예를 접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대전실업대 교수를, 1976년부터 이화여대 미대 교수를 역임하다가 1979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업 도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현대 도예에서 흔히 사용되는 가스가마를 사용하지 않고, 손수 흙벽 오름새가마(여러칸의 가마, 登窯)를 만들고 장작을 때서 마치 옛 도공처럼 작업을 하는 모습은 그의 고집스러운 예술혼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의 작품들은 크게 유백색 빛이 나는 백자들과 겉이 터지고 갈라져 마른 땅을 연상시키는 작품들 군(群), 그리고 디자인적인 도안에서 출발한 조형적인 작품들, 추상충동을 느끼게 하는 자유로운 형태의 작품들로 분류될 수 있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그릇(器)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도예 전통의 맥락 가운데 현대의 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최신웅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마음의 향기'
'마음의 향기'
 이종수作 '마음의 향'
이종수作 '마음의 향'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