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일 作

향토적 정서가 물씬 풍긴다. 언뜻 보면 가족애가 느껴지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노스탤지어의 감정 샘을 자극하는 그림이다. 겉보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일제의 수탈과 압제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의 작품이라면 느낌은 금세 달라진다. 작가가 친일파 후예이다 보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근대문화재로 지정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작품은 이영일(1904-1984)의 `시골소녀(1928)`다. 작품은 완벽한 조선색을 띠고 있다. 제목이 시골소녀라고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곤궁해 보이지도 않는다. 동생을 업고 서 있는 소녀와 쪼그려 앉아 벼 이삭을 줍고 있는 소녀, 미루어 짐작건대 삼남매가 분명하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꼼꼼하게 뜯어보면 전혀 아니다. 이삭을 줍는 시기면 쌀쌀한 초겨울인데도 짚신도 없이 맨발이다. 요즘 같으면 또래와 어울려 신나게 놀 나이인데 암울한 시대는 그것조차 허락지 않았다. 먼 곳을 응시하는 기다림의 눈빛이 그나마 다행이다. 황량한 벌판에서 이삭을 줍는 어린 삼남매를 정겹게 묘사한 것은 헐벗고 굶주린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을 미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시골소녀`는 일제의 문화정책의 산물이나 다름없는 `향토색` 작품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제는 조선색을 강요하면서 피폐한 농촌 풍경을 목가적이고 평화롭게 표현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일제의 입맛에 맞춘 작풍이라는 얘기다. 기법은 일본화 표현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이른바 몽롱체 화법이다.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면서도 단조로운 필선을 사용한 장식적인 형태, 몽롱한 인물의 윤곽선 등이 그렇다.

작가는 서울행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창가에 비친 이삭을 줍는 삼남매의 모습을 보고 그렸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서민들의 일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만 표현했던 것이다. 억지춘양이지만 혹자는 치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면에서 본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문화재 지정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창덕궁 창고에 방치돼 있던 것을 1971년 발견해 보존처리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변상섭<교육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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