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평생 지조와 강렬한 의리정신을 보여주신 자랑스러운 충청의 선비다. 단재 선생은 스스로 정몽주의 `일편단심가`를 본떠서 `일편단생(一片丹生)` 또는 `단생`이라고 하였다가 `단재`라고 자호할 만큼 평생 강한 지조와 절의를 행했다.

선생은 1880년에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대전광역시 동구 어남동)에서 태어났다. 도리미 마을은 대전시 남쪽의 보문산과 만인산 사이의 깊은 산골 마을로 하늘만 빼꼼하게 보이는 가난한 산골 마을이다. 영조 때 이인좌의 난 이후 몰락한 가문에서 자란 단재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강한 교육열을 지니고 있었던 조부와 부친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19세 되던 1898년 가을에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했다.

그해에 선생은 만민공동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던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성균관을 마친 후 서울과 고향을 왕래하면서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이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면서 언론인, 역사학자로 활약했다. 당시 신문사 사장인 베델이 미국 유학을 적극 주선했으나 단재는 사치라며 거절하고 비밀결사체인 신민회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만주, 러시아, 중국 등을 전전하면서 고난에 찬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에 충청도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임정에서 탈퇴하고 무력 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독립 자금을 마련하다가 대만에서 체포되어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 광복을 위하여 큰 고생을 했지만 단재 선생처럼 학문과 실천 양면에서 투철했던 지사는 드물었다. 단재는 평생 독서와 집필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서서 세수를 했다. 투옥된 지 7년 후 병보석으로 나올 수 있었으나 보증인 중 한 사람이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끝내 거절하고 통한스럽게도 감옥에서 순국한 근대기 한국 선비의 상징이었다.

김문준 건양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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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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