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구 호서대 총장

현대 연극에서 비극과 희극을 구분하는 기준은 고립 또는 단절이다. 결말의 슬픔과 기쁨으로 판단했던 전통적인 기준으로는 베케트, 이오네스코와 같은 현재 작가의 작품을 희극과 비극으로 분류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 연극에서 극이 진행되면서 주인공의 고립(isolation)이 심화되면 비극으로 그리고 고립이 극복되어 화해의 결실을 맺으면 희극으로 분류한다. 이러한 분류로 보면,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끊임없이 기다리면서 서로 소통할 수 없는 무의미한 말들을 지속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비극이 분명하며 비록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이라는 슬픈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두 가문이 오랫동안의 숙적관계를 청산하고 화해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희극이 된다.

이러한 기준을 현대인의 삶에도 원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불통과 단절의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바로 우리의 삶이 현재 행복하지 않다는 비극적 분위기의 전달에 다름 아니다. 물론 현대인의 삶이 팍팍해진 것에는 후기 자본주의의 극심한 배금주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큰 원인이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우리 언어가 갖고 있는 소통의 효력이 변질된 것에 있다고 본다. 과거 20세기까지는 언어라는 기호와 그 뜻이 일대일로 상응하는 단일 언어의 세계 즉 유니보컬의 세계였다. 군대의 지시어, 명령어로 대표되는 유니보컬(univocal)의 세계는 지시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 사이에 분명하여 명확한 소통이 가능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를 경험한 현대인들의 언어는 기표와 기의가 서로 미끌어지는, 즉 하나의 기표에 여러 가지 기의가 포함되는 이퀴보컬(equivocal)의 세계로 변질되었다. 정치인들의 현란한 수사나 광고의 카피들은 이러한 다중 언어들의 좋은 예이다. 그 결과 현대인들의 소통과 이해는 점점 더 모호한 상태 속에서 단절된 것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비극의 탄생인 것이다.

언어의 혼잡과 그로 인한 분열은 이미 바벨탑의 예(창세기 11: 1-9)에 잘 나타나 있다. '혼잡'을 뜻하는 바벨의 근원적 비극은 언어의 혼란으로 인한 인간 소통의 부재를 넘어 인간과 창조주와의 단절까지 초래한 것에 있다고 본다. 사실 신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남은 것은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삿: 21: 23)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인간관계와 그 소통을 악화시키는 주원인이 된다.

이퀴보컬의 세계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소통을 보다 수월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단순히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을 넘어 현대인의 비극을 치유하는 행복의 열쇠를 전달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현대 철학자 마틴 부버는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형태를 '영원한 그대(eternal Thou)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목적적 관계'라고 정의했다. 즉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영원한 그대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행복한 관계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소견만을 좇는 아집과 교만보다는 자신을 상대보다 낮은 자리에 세우는(understanding) 겸손함과 자신의 관점을 버리고 영원한 절대자의 관점을 취하는(Verstand)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의 전환이 있다. 언어 그 자체에만 집중하기보다는 말하는 사람 자체를 이해하려는 것에서 소통의 첫 단추를 열어 가는 것이다. 결국 고립과 단절을 넘어서는 것은 이기적 중심에서 벗어나 상대를 먼저 이해하려는 겸손하되 적극적인 태도의 전환인 것이다.

전환은 현재 지향하던 방향에서 돌이킴을 의미한다. 몸 전체가 이미 한 방향으로 결정된 상태에서 시선을 바꾸어 정반대의 방향으로 고쳐 서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습관과 생각을 과감하게 바꾸어 새로운 곳으로, 두렵고 떨리더라도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비극에서 희극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의 전환은 이처럼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회개가 자신을 부인하고 절대자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 현대인의 비극인 고립과 단절은 '내가 아닌 너를 향한' 방향의 전환과 그것을 위한 결단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찬선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