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일 정상회담 개최 제의에 대해 정부가 '실질적인 회담이 열릴 수 있는 여건이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고 보고 거절했다는 소식이다. 일본은 그제 기시다 노미오 외무상이 이병기 주일한국대사에게 다음달 5일 러시아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갖자고 공식 제의한 바 있다. 두 나라 정상이 상대방 국가를 방문해 회담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우니 다자간 회동 자리에서라도 약식 회담을 해보자고 한 듯하다. 정부는 하루 뒤인 어제 회담을 열 형편이 안 된다, 현 상황에서는 무리라고 한 건 잘한 일이다.

이런데도 일본은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은 모양이다. 나아가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일본 언론들은 한·일 국회의원과 지식인들이 참가하는 가운데 열리는 한일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서울에 오는 후쿠다 야스오 전 일본 총리가 청와대로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할 것이라고 어제 보도했다. 후쿠다 전 총리가 박 대통령을 만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일단 박 대통령이 후쿠다 전 총리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긴 했다. 역대 일본 총리 중 대(對)아시아 외교를 중시했고 상대적으로 유연한 것으로 알려진 후쿠다 전 총리가 입국한 뒤 그에 대한 분위기가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오늘 입국해 외교부의 동북아국장 등을 만날 예정이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도 정상회담을 여태 열지 못한 아베 내각이 한국과의 정상회담만이라도 열자고 매달리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은 물론 중국에게 '왕따'를 당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지금까지 아베 내각이 보여준 일련의 태도는 태평양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한국과 중국이 인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주변국을 침략해 무자비한 살상과 약탈을 저지르고 식민지로 삼겠다는, 70여년 전의 일본 정부의 지향점과 유사하다.

침략을 금지하는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시도하는 아베 내각은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며 과거 역사와 전쟁위안부 운영을 전면 부정하는 도발을 저지르고 있다. 전범 깃발인 욱일승천기를 공식화하겠다고 드러내놓고 밝히는가 하면 경항공모함을 진수하는 등 끊임없이 군비를 확장해 주변국을 위협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또 지난 15일 열린 8·15 전몰자 추도식에서 역대 총리들과 달리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가해 사실과 그에 대한 반성, '부전(不戰)의 결의'를 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인식에서 변화가 없음을 재확인시켜줬다. 처참한 패전으로 끝난 태평양전쟁의 교훈을 아베 내각은 잊은 것처럼 여겨진다. 역사인식의 차이가 이처럼 큰 아베 정권과 정상적인 대화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한국인과 중국인은 거의 없다.

동북아시아는 세계 정치·경제·군사·문화 등의 영역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이런 동북아에서 한·중·일 세 나라의 관계는 곧 역내 안정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각 분야에 걸친 세 나라의 협력이 더욱 합쳐지면 동북아가 북미·유럽에 견주는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전망과 기대가 있는 곳이다. 이런데도 일본이 대규모 군사충돌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전(前)근대의 상태로 후퇴하려고 하는 것을 반길 나라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한·중 어느 나라도 아베 총리와 대화를 안 하려는 것이다. 일본이 호전적이고 과거로 퇴행하려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일본과 정상회담을 할지 말지는 순전히 아베 총리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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