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결론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강한 의지와 부처 칸막이를 뛰어 넘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 회견에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3월 3일 정부조직법을 공포해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했다. 졸지에 기관 하나를 뺏기게 된 당시 김보현 농림부장관은 반박 논리를 들고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농림부는 식량증산 해야지 조림녹화까지 하기에는 버겁다. 내무부에 빌려줬다 10년 뒤에 돌려 받으라고 했다”며 당시 치산녹화 사업을 담당했던 고건 전 총리는 얼마 전 한 TV 프로에서 당시 상황을 전했다. 법까지 개정해 산림청을 농림부가 아닌 내무부에 둔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세계적으로도 그런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도 강행한 것은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 때문이었다. 산림청은 당시 농림부의 외청으로 본청만 서울에 있는 단일 기관이었다. 전국에서 동시에 지속적으로 녹화사업을 해야 하는데 동원할 조직과 인력이 없었다.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의 지휘권을 쥔 당시 김현옥 내무장관은 3월 16일 전국의 도지사, 시장, 군수, 경찰서장 등을 내무부로 불러 모았다. 대통령의 뜻을 전하면서 오로지 치산만을 강조했다. 이날부터 내무부는 새마을운동과 똑같이 내무공무원을 총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산림청장에게도 막강한 힘을 실어줬다. 비상국무회의나 새마을 국무회의에 배석하도록 한 것이다. 당연히 예산문제 등 관계부처와의 협조도 원활했다. 지방조직도 일사분란하게 갖췄다. 전국 각 도에는 산림국이, 시·군에는 산림과를 신설했다. 10개년 계획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6년만인 1978년에 끝났다. 이 기간 동안 108만㏊에 나무를 심고, 420만㏊에 육림을 조성했다. 사방사업은 4만2000㏊에 걸쳐 추진했고, 30억 그루의 양묘도 생산했다. 1차 치산계획에 참가한 단위마을은 전국에 걸쳐 3만4000여개에 달했다. 대한민국의 치산녹화는 온 국민이 참여해 이룬 인간승리이자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였다.
요즘 각 부처들이 다른 부처와 앞다퉈 양해각서(MOU)를 맺고, 마치 대단한 일인 양 내세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애라”고 강조하자 나온 현상이다.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애라는 것은 제 영역만 챙기고 타 부처 일은 나 몰라라 하는 행태를 이제는 버리고 부처 간 협업과 조율로 정책효과가 국민에게 전달되도록 하라는 뜻일 것이다. 치산녹화사업은 부처칸막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책효과는 추진의지와 비례한다. 국민을 위해 반드시 추진해야 할 정책이라면 먼저 확고한 의지부터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추진 주체에 인력과 예산 등을 뒷받침해주면 부처간 협의와 조율은 잘 이루어질 것이다. 칸막이부터 의식해서 될일은 없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