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며칠 전 계룡산 부근의 한적한 국도에서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는 30-40명이 행군하는 대열을 본 적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학생들은 한없이 지친 표정으로 피로와 고통에 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국토의 아름다움` 또는 `애국정신` 등의 표현을 내건 국토순례단 또는 비슷한 이름의 모집에 참여한 학생들이겠지만, 대열 오른쪽에 솟아 있는 계룡산의 풍광에는 한치의 관심도 없다는 듯 온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이겨내며 걷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하는 듯 보였다. 이 학생들의 대열은 당연하게도 태안 앞바다에서 고교생 5명이 사망한 사고의 기억과 오버랩 된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아직 성장이 완결되지 않은 청소년들이 극기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수백㎞에 달하는 거리를 불과 며칠 만에 주파하거나, `얼차려`로 점철되는 군대식 훈련을 감내해야 하는 모습은 보는 입장에서도 편치 않다. 1년에 한번 하는 이런 식의 훈련은 체력단련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간 뒤 어른들의 희망대로 정신력이 강화되는 효과를 낸다는 사례를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훈련, 병영캠프가 도처의 고등학생 등을 상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건 교육청 등의 실적내기용 및 이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 간의 이해타산이 맞물린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다. 교육청 공무원들이나 선생님들이 별다른 고민 없이 나라사랑운동 등의 타이틀에 맞춘 프로그램임을 내세워 이런 캠프로 학생들의 등을 밀어넣는 건 1990년대 없어진 `교련`의 추억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전국의 고교와 대학에 교련 과목이 일제히 생긴 건 1968년 김신조 일당으로 불리는 북한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 직후 향토예비군의 창설과 함께다. 당시 교련 과목 설치와 예비군 창설을 결정한 배경에는 한국전쟁 초기 38선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황망하게 밀려 내려갔던 뼈아픈 기억이 작용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 교련 과목이 고교와 대학에서 없어진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기억은 냉철한 분별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처럼 수십 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아무튼 교련 과목이 30년 가까이 고교와 대학에서 존재했던 건 한국전쟁 재발과 같은 극단적인 비상사태가 일어날 경우 63년 전 있었던 학도병 식의 병력충원 방식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300만을 넘나드는 숫자의 예비군이 있어도 그랬다. 트라우마 같은 기억은 이처럼 끈질기다.

그러나 전쟁은 멈춘 지 60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우리는 40년 넘게 경제성장을 이뤘다. 40년간의 경제성장은 우리 사회를 양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바꿔 놓았고, 남북한 간의 경제력·군사력 대결 판세에서는 이제 게임이 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가 됐다. 지난 봄 전쟁의 공포가 일긴 했지만 전면전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한국전쟁과 같은 양상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공포나 다름없는 기억을 교육청 공무원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지니고 있다는 게 이해는 되지만, 그 기억이 현실 즉 현재의 사실을 반영하는지를 자문해보고 결과를 교육행정에 반영했어야 한다고 본다. 관성에 가까운 내용의 공문서를 주고 받기 전에 이게 현실에 부합하는 지침인지 따져보기는 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영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을 내려놔야 했지만, 지구촌에서 오늘날과 같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의 하나는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 교육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의 교육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교육청과 학교가 지목한 병영캠프에 열외 없이 입소해야 하거나, 요점의 암기를 강조하는 주입식 교육은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태안에서의 사고를 계기로 `학교가 달라졌어요`, `교육청이 달라졌어요`라는 말이 주변에서 들렸으면 한다. 그게 희생된 학생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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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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