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선비 조헌(趙憲, 1544-1592) 선생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다가 순절한 의병장이다.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가 이끄는 승병과 함께 청주를 탈환하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신 분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조헌 선생을 아예 모르거나, 의병장이라고 하니 군인으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선생은 율곡 이이 선생의 문인 중 사계 김장생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유학자로,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대학자이다. 자신의 호도 중봉이라는 호 외에도 율곡의 후인이라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고 하여 율곡 선생을 대단히 사모하는 뜻을 밝힌 분이다. 선생은 고종 때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묘는 우리나라 성현 가운데 18분만을 모신 국가의 사당으로, 이곳에 모신 18분은 한국 정신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문묘에 배향되려면 학문과 절의 두 측면이 모두 후세에 큰 귀감이 되어야 한다.

조헌 선생은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으나, 충청도와 인연이 대단히 깊은 자랑스러운 충청 선비이다. 그는 임진왜란 전에 보은현감을 지내기도 하고, 공주향교의 제독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관직을 그만둔 뒤에도 포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옥천의 안읍밤티(安邑栗峙)에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이곳에서 현재 해마다 9월에 중봉충렬제가 열린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에는 역시 조헌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이지당(二止堂)이 남아 있다. 그 마을 옛 이름이 각신동이어서 조헌 선생이 각신서당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후에 송시열이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즉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의 `시경` 문구에서 끝의 두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이라고 고쳐 쓴 편액이 전한다. 선생을 모신 사우가 전국에 7곳인데 옥천과 금산의 표충사, 금산의 종용사와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 충청도에 5곳이 있다. 1971년에는 금산에 종용사를 지어 제향하고 칠백의총을 성역화했는데,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충청유교문화권 개발의 일환으로 다시 우리나라의 국력에 걸맞은 중봉기념관 건립이 필요하다. 아울러 그곳에 애국애족의 정신을 되새기는 청소년 교육시설을 세워 전국 청소년을 위한 민족역사 교육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김문준 건양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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