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양대 대우교수 언론인

김정일·노무현 대화록이 공개돼 시끄럽다. 국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국민들은 이 저질 정치 싸움이 놀랍고 부끄러울 뿐이다. 대통령의 권위와 국가보위 책임을 접어둔 노 전 대통령의 김정일과의 대화 일부를 확인한 국민들은 DJ·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법·저자세 대북 접촉의 최종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NLL은 1953년 유엔군 사령관이 공표한 남북 해상 경계선으로 노 전 대통령이 단독 파기할 수 없는 실질적인 군사분계선이다. 6·25 정전 당시 유엔군은 신의주 앞바다부터 삼면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클라크 대장은 북한의 '전전상태(status quo ante bellum) 복귀' 애원을 고려해 38도선 이남의 서북 5도부터 유엔군 관할 지역으로 하면서 북한의 해주 해로도 열어주는 NLL을 획정하여 북한도 이론이 없었다. 그래서 북한은 59년 '조선중앙년감'에 황해도 남쪽 한계선을 NLL로 인정했고 91년 12월 13일 정원식·연형묵 남북 총리가 조인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11조 '남북 불가침'에도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명기했다. 91년에도 NLL을 남북 불가침 경계선으로 합의한 것이다.

북한은 84년 수재구호물 제공 시에도 NLL에서 인계하고 돌아갔고, 북한 함정의 NLL 침범에 대해 경고하면 즉시 후퇴하는 등 사실상 NLL를 인정해 왔었다. 유엔군 사령부가 NLL을 공표한 후 북한은 20년 넘게 한국군이 관리해 온 NLL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통고받은 지 12개월 내 이의가 없으면 수락한 것으로 본다"는 빈 협약에 따라 북한이 국제법상으로도 NLL을 공인한 것으로 간주돼 왔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1998~2003) 출범 후 북한은 99년 9월 서해 해상에 군사분계선을 발표하고 2000년 3월엔 '서해 5도 통항질서'를 선포하여 NLL 분쟁 지역화를 획책하기 시작했다. DJ가 북한의 연방제를 사실상 수용한 6·15 선언 후 북한 선박이 남한 해역을 시험하듯 자주 월경했고, 연평해전·대청해전·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도발 등 NLL 실효(失效)를 노린 해상 침략이 있었으나 해군과 공군의 즉각적인 방어가 불가능했었다.

문제의 김정일·노무현 대화록은 서해해전에서 한국 해군과 공군의 당연한 반격을 못한 원인을 추론케 한다. "NLL은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 같은데… 그러나 현실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서로 군사를 철수하고 공동어로 평화수역을 하자는 김정일 위원장의 구상과 말씀에 대해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노 전 대통령은 10·4 공동선언 3항, 4항, 5항에 걸쳐 NLL 기능 실효를 노린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 조성을 약속했다.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설정하고 한강 하구를 공동 이용하여 서해 일부를 무장 해제시키는 남북공동선언을 김정일은 2004년 10월 4일 조인하고 DJ의 6·15선언과 함께 NLL을 무력화시키는 10·4선언 이행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 왔으며 남한의 종북세력도 이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일파트너십선언에 앞서 독도 근해를 한일 공동관리구역으로 합의했던 전철을 노 전 대통령이 NLL 실효 수순으로 서해 공동어로수역 이행으로 되밟게 하려 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와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NLL 수호 의지를 밝혔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는 5일 한반도 선진화재단 세미나에서 "통일은 남북한 이질적인 정치 체제의 통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민족'을 내건 북한과 종북세력의 감상적인 선전 선동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며 북한의 실체를 파악할 북한 연구의 질 향상을 촉구했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등을 국가안보 자문단으로 선임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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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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