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대전·충남 6·25 참상<下> 충청지역 전쟁

6·25 당시 충청권 여러곳에서 전투가 이뤄졌다.

딘 소장이 지휘하는 미 24사단은 천안-전의-조치원-금강(대평리와 공주)-대전에서 북한군 1군단을 맞아 지연전을 펼쳤다. 7월 7-9일 벌어진 천안전투에서 미군은 34연대장 마틴 대령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전의 개미고개에서도 병력과 화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에 밀렸다. 24사단은 7월 13-16일 펼쳐진 금강전투에서 포병부대 붕괴와 북한군의 기습적인 퇴로 차단으로 황급하게 철수, 대전에 저지선을 폈다.

미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지연전을 펼치는 사이 충북 쪽에서는 국군이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며 방어전을 펼쳤다.

충북 음성에서는 7월 4-10일 국군 6사단 7연대가 승리에 도취해 남하하던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급습, 국군 최초의 큰 승리를 거뒀다. 진천-청주에서는 국군 혼성수도사단이 북한군 2사단을 맞아 12일 동안 공방전을 벌여 대전으로 우회하려던 시도를 좌절시켰다. 단양에서는 국군 8사단이 남한강을 건너 북한군의 8사단 지휘소를 기습, 아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

7월 23-29일 영동과 황간에서는 미국 1기병사단과 제25사단 제27연대가 추풍령을 넘어 김천-상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2개 사단을 1주간 지연시켰다. 23-25일 영동전투에서 미 1기병사단은 포병과 박격포를 퍼부어 북한군 2000여 명을 죽였다. 영동-황간 전투는 미군의 포병과 공군력이 위세를 떨쳤다. 여기서 미군은 전사 53명, 부상221명, 행방불명 49명, 총 323명의 손실을 입었지만 북한군 2사단은 사망 3000명 이상, 전차 파괴 6대의 큰 피해를 입었다. 영동전투에서 북한군 게릴라가 후방을 차단하고 피란민과 함께 뒤섞여 남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미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노근리 사건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6·25 전쟁은 충청인들에게도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안겨줬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무고한 백성들의 죽음이다. 무엇보다 보도연맹 사건이 가장 컸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운동 경력자를 모은 반공단체로 좌익인사 전향과 보호가 목표였다. 한때 가입자가 30만 명에 달했다. 정부와 군경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연맹원을 무차별 검속하여 학살했다. 대전 산내에서 전국 최대규모 학살이 일어났고, 공주에서도 7월 8일 400여 명이 왕촌 살구쟁이에서 학살됐다. 청주형무소도 약 1200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청원군 남일면 분터골 등에서 살해됐다.

북한군 후퇴 때에는 우익인사가 대거 학살됐다. 대전교도소에서 1557명이 죽었고, 청주형무소에도 9월 24-25일 200여 명이 죽음을 당했다. 서천에서는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9월 27일 경 서천등기소 창고에 감금되어 있던 240-250명을 불태워 죽였다. 서산과 태안에서도 공무원·경찰·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와 가족이 떼죽음을 당했다.

미군에 의한 희생도 잇따랐다. 서천 판교에서는 임시 장터에 미군이 폭격을 가해 100여 명이 죽었다. 충북 청원 현도에서는 미군의 오폭으로 피란민과 국군 후퇴 병력 수십명 숨졌다. 1950년 7월 말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는 미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경부선 철로와 굴다리에서 민간인 135명이 사망하고 47명이 부상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김재근 기자 kim88@daejonilbo.com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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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남쪽 전투 1950년 7월 14일 미 24사단 병력이 금강 남쪽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금강 남쪽 전투 1950년 7월 14일 미 24사단 병력이 금강 남쪽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보도연맹원 등 공주교도소 수감자들이 처형장(대전)으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실렸다. 차량에 탑승한 헌병들도 총을 들고 있고 뒤쪽에도 무장한 군경이 보인다. 미국 AP 종군기자 헤이우드 매기가 촬영.
보도연맹원 등 공주교도소 수감자들이 처형장(대전)으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실렸다. 차량에 탑승한 헌병들도 총을 들고 있고 뒤쪽에도 무장한 군경이 보인다. 미국 AP 종군기자 헤이우드 매기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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