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60주년 특별기획 사진으로 본 대전·충남 6·25 참상 - 산내학살과 대전전투

대전은 6·25 전쟁 최대 '비극의 도시'로 손꼽힌다.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길목에 있다는 이유로 피아간 공방이 치열했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지마자 곧바로 천안-조치원을 거쳐 대전으로 향했다. 북한군이 대구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공세를 취하자 연합군은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수차례 대전역과 그 주변을 폭격했다.

가장 끔찍한 것은 피아가 엄청난 숫자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1950년 6월 말-7월 초 국군과 경찰이 보도연맹 및 여수·순천사건 관련자 등을 집단학살했고, 9월 말에는 북으로 쫓겨가던 북한군이 충남과 대전지역 우익과 유지들을 죽였다. 죽고 죽이는 보복극이 벌어지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것이다. 좌우익에 의한 학살 희생자는 모두 대전교도소 재소자들이었다.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대전교도소 수감자 '산내학살' 사건은 국가와 검찰, 군경이 모두 가담한 조직적인 범죄로 드러났다. 이승만 정부가 부산으로 피란하고 북한군이 밀고내려오자 오열의 준동과 사회혼란을 우려하여 법과 무관하게 민간인을 집단학살한 것이다.

산내학살 1차는 6월 28일 경부터 6월 30일 경, 2차는 7월 3일-5일, 3차는 7월 6일-17일까지 3차례 걸쳐 이뤄졌다. 이 기간 동안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재소자, 보도연맹원, 정치사상범, 징역 10년 이상 일반사범 등이 트럭에 실려가 처형됐다. 군경이 처형하는 현장에 미군이 입회했고 사진까지 찍었다. 산내학살 희생자는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2차 때 희생자가 1800여 명으로 1차와 3차를 더하면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고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대전교도소에서는 또 한차례 학살이 벌어졌다. 북한군에 의한 우익 학살은 9월 25-26일 이뤄졌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충남의 우익인사들이 대거 수용돼 있었다. 북한 점령기 이들을 체포하여 대전교도소에 가둬뒀던 것이다. 북한군은 후퇴하기 직전 우익인사들을 죽여 대전형무소 우물에 넣기도 하고, 형무소 뒤쪽 밭에 고랑을 파고 처형했다. 인근 용두·탄방동 산으로 끌고가 처형하기도 했다. 1952년 충남도청은 대전형무소 주변과 목동, 용두산 일대에서 수습된 희생자가 1557명이라고 발표했다.

김재근 기자 kim88@daejonilbo.com

곽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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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미군이 1950년 9월 22일 대전에 진입하기 위해 외곽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미군이 1950년 9월 22일 대전에 진입하기 위해 외곽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다.
 1950년 7월 21일 대전시내에 진입한 북한 105전차사단. 이 부대는 서울을 점령한 공로로 '근위서울 제105탱크사단' 칭호를 얻었었지만 불과 2달 뒤 아군의 공습과 로켓포 공격으로 완전히 와해됐다.
1950년 7월 21일 대전시내에 진입한 북한 105전차사단. 이 부대는 서울을 점령한 공로로 '근위서울 제105탱크사단' 칭호를 얻었었지만 불과 2달 뒤 아군의 공습과 로켓포 공격으로 완전히 와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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