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원 충남역사문화연 연구위원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부흥장이자 당나라에서 위명을 떨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장군이었다. 백제인으로서 흑치상지만큼 많은 자료를 남긴 인물도 드물다. 그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구당서', '신당서' 등에 열전이 실려 있으며 묘지명도 전해진다. 따라서 그의 일생과 활동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백제사의 입장에서 흑치상지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또한 드물다.

흑치상지는 무왕 31년(630)에 출생, 689년 6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백제 서부인으로, 선조는 원래 부여씨였지만 흑치지방에 봉해져 자손이 이를 성(姓)으로 삼았다. 흑치지방의 위치에 대해서는 예산지역, 또는 동남아나 중국 등에 비정되고 있는데, 국내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20세가 되기 전에 가문에 의해 제2위인 달솔의 관등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흑치가는 대대로 달솔의 관등을 승계한 유력귀족이었던 것이다. 660년 7월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나당군에 항복하자 흑치상지도 항복했다. 흑치상지는 자신의 출신지역으로 달아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663년 부흥운동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시점에 그는 나당군에 항복을 했으며, 이어 자신이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임존성을 함께 거병했던 부하 장수인 사타상여 등과 더불어 공격해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부흥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물론 당시 그의 항복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의 성품에 관한 기록으로 볼 때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투항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태자였던 부여융이 웅진도독이 되어 백제의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위임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을 통해 다시 백제의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당시 당나라는 백제를 당의 한 지방으로 편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군에 항복했다는 사실은 당나라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였을 것이다. 비록 흑치상지가 개인적으로는 영웅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의 행위가 백제사의 입장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과 자신의 반역행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이들은 항상 존재했다. 다만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후세사람들의 몫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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