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원 충남역사문화연 연구위원

계백은 의자왕대의 장군으로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과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이다. 계백에 관해서는 '三國史記' 열전 7에 신라인 12명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인물들은 모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특징이 있다.

계백은 나당군이 침략해 오자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그는 출정에 앞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먼저 목 베고 결연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리고 처음 4번의 전투에서는 모두 승리하였지만 결국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며,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런데 계백의 충의정신이 더욱 빛나는 것은 단지 전투에서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국운을 건 전투였지만 도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비록 적국의 장수였지만 사로잡은 관창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투였지만 계백은 진정한 충의 가치를 인식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계백에 대한 평가는 역사상에서 양면성을 띠고 있다. 선조 임금은 역대 왕들의 능을 보수하면서 역대 충신들의 무덤도 함께 보수하도록 했는데, 백제의 충신으로 성충과 계백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그의 충의정신을 높게 평가하였다. 반면에 출정에 앞서 가족을 죽인 것은 너무 심한 처사일 뿐만 아니라 전투에 앞서 패배할 것을 예상했다는 점 등을 들어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계백이 출정에 앞서 처자를 죽인 행위가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는데, 백제 멸망기의 정치상황을 이해한다면 그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즉, 당시 백제 정국은 아첨하는 무리가 권력을 장악하고, 고위 귀족이 신라와 내통하는 등 자신들의 권력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정국상황에서 계백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의 최고 지휘권자가 되었다. 따라서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 계백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병사들로 하여금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독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출전에 앞서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이는 행위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계백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였지만 타인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

또한 황산벌 전투는 국가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자 한 계백과 5000 결사대의 충의정신이 서려 있다는 점에서 비록 패배한 전투였지만 백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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