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원 충남역사문화연 연구위원

우리나라 역사상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만큼 혹평을 받는 왕도 드물다. 이는 왕조국가에서 당대에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상 많은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으며, 결국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럼에도 유독 백제 의자왕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제 의자왕 하면 먼저 삼천궁녀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백제의 삼천궁녀에 관한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삼국유사' 권1 태종 춘추공조에 타사암 전설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내용은 사비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끌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므로 세상에서는 이곳을 타사암(墮死岩)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은 당에 가서 사망하였으므로 사실이 아니고, 다만 궁녀들만이 여기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사비도성이 나당군에 의해 함락되고 왕도가 무자비하게 약탈되는 상황에서 후궁뿐만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던 많은 귀족의 부인이나 아녀자들이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곳 부소산성 절벽에서 강으로 몸을 던져 절의를 지켰다. 그리고 당시의 일들은 후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고, '삼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은 조선 초의 문신 김흔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읊은 것이 최초였다. 이후 윤승한의 소설 '김유신'에서 '삼천궁녀'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말은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의자왕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자왕은 태자 시절에는 '해동증자'로 불릴 정도로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즉위 초에는 왕권강화와 대외팽창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하지만 나당군의 침략 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의자왕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의자왕이 처음부터 폭군이었고, 방탕한 왕이었다는 인식은 결과론에 따른 역사적 왜곡에 의한 것이다. 기존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의자왕의 공과(功過)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교육을 통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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