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byun806 @daejonilbo.com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목련은 한줄금 봄비에 어느새 떨어져 땅바닥을 뒹군다. 짓밟혀 뭉개진 꽃잎은 추한 모습으로 변하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봄바람에 꽃비가 되어 휘날리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봄은 지는 꽃과 함께 속절없이 지났다. 계절의 여왕 5월이 왔건만 대한민국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북한 김정은 제1비서의 철없는 핵시위 강짜에 멈짓한 봄은 저만큼 물러나 있는 형국이다.

벚꽃이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열매가 자랄 것이다. 엄연한 자연의 순리다. 계절은 봄이지만 남북 관계는 엄동설한처럼 꽁꽁 얼어 붙었다. 실타래처럼 꼬이고 엉켜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종을 잡기가 어렵다.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치킨게임' 식으로 막다른 골목을 향해 돌진을 하는 형국이다. 골목 끝에는 '개성공단 폐쇄'라는, 남북 모두가 원치 않는 불행한 종착역이 기다리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김정은의 착각과 오판이 일차적 원인이다. 두 번째 패착은 박근혜정부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는 지난 2월 3차 핵실험 후 국제사회의 제재 움직임에 평상심을 잃었다. 정전협정과 남북한 불가침 선언 백지화, 군 통신선 단절, 영변 핵시설 재가동, 개성공단 출입제한 조치 등 '말 폭탄'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상대방 반응이 어떻든 말로서 할 수 있는 도발과 위협은 모두 동원했다. 지도자로서 품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정은은 그렇게 루비콘 강을 건너는 자충수를 택했다. 남한 정부를 제 입맛대로 요구하고, 윽박지르고 으름장을 놓아도 고개 숙이고 들어오던 말 잘 듣던 과거 진보정권쯤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시그널을 보냈으니 남한 정부는 허둥대며 손을 내밀고 정상회담 뒷거래 제의도 기대했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이 가져다 준 단맛의 추억을 생각하며 머릿속엔 덤으로 따라올 큰 선물도 그려보면서 측근들과의 자축파티를 상상하며 한순간이지만 행복한 춘몽(春夢)의 기쁨을 만끽했으리라.

꿈을 꿀 때는 달콤하다. 깨고 나면 허망하기 짝이 없다. 박 대통령의 '개성공단 인력 철수'라는 초강수 일격에 놀란 김정은은 외마디 잠꼬대를 하며 꿈에서 막 깨어난 듯 경황이 없다. 기대했던 각본과는 전혀 엉뚱한 결과에 공황상태다. 자존심에 치명타를 입어 뚜껑이 열릴 지경이지만 모든 게 자신의 과오니 하소연도 못한 채 속앓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연간 9000만 달러씩 챙기던 고정 수익이 당장 끊길 처지다. 5만4000명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부양가족까지 포함하면 30만 명의 생계가 풍전등화다. 젊은 혈기를 내세워 부린 객기의 대가 치고는 너무 크다. 속이 아프고 쓰릴 테지만 애써 태연한 척 내색도 못하고 있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가 없고, 흘러간 강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핵만 보유하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는데 남한을 비롯해 국제사회가 냉담하다. 믿던 중국과의 관계마저 소원해지고 있다. 진퇴양란이고 백척간두다. '최고 존엄'의 처지가 아주 궁색해졌다.

대한민국의 봄은 봄답지않게 냉기가 가실 줄을 모른다. 김정은의 광기어린 극언과 핵 망언 탓이다. 대한민국의 개성공단 인력 철수라는 맞대응에 김정은 광기의 동력을 잃었지만 봄기운이 스며들기에는 여전히 그 틈이 좁기만 하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결자해지라고 원인 제공자가 갈등을 풀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핵 망언을 멈추고 개성공단에서 철수시킨 근로자들의 재투입을 약속하는 등 남북 관계 정상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핵 포기와 함께 중단된 6자 회담도 재개해야 함은 물론이다. 무모하게 '박근혜정부 길들이'에 나선다거나 핵전쟁을 운운하다가는 국제사회에서 벌초 대상 1순위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남한 정부 역시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하거나 코너로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대응 자세가 아니다. 대화의 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명분을 주는 배려를 발휘해야 한다. 대화마저 단절된다면 통일로 가는 길은 갈수록 험하고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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