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헌 속 내포의 정의

 이중환의 '택리지'.
이중환의 '택리지'.
내포신도시가 충남의 미래 100년의 구심점으로 선포됐지만 '내포'는 여전히 낯 선 단어다. 사전적 의미로는 '바다나 호수가 육지로 후미진 부분'을 뜻한다. 뭍 안까지 물이 드나들어 순 우리말로는 '안개'다. 남아 있는 문헌에 내포가 처음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 원효 대사의 '원효결(元曉訣)'이다. 원효는 "오성지간(烏聖之間·오서산과 성주산 일대)은 산 모습과 물 기운이 가장 뛰어나 나라 땅의 내장부(內腸部)와 같다 하여 내포(內浦)라 한다"고 기록했다.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인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책 '십승기(十勝記)'에서 "공주의 유구와 마곡(계룡산)의 물이 포괄하는 곳, 무주의 무풍(대덕산), 봉화의 춘양(태백산), 보은의 속리산, 부안의 변산, 성주의 만수동, 운봉의 두류산(지리산), 예천의 금곡동, 풍기의 금계촌(소백산), 영월의 정동 상류 등 열 곳은 병란을 피할 만한 곳이다"라고 했다. 특히 "이 중 유·마의 사이에서 서쪽으로 한고개, 차동고개를 넘은 곳이 내포지방이다"라고 썼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 "무성산(茂盛山·공주 서쪽 산)은 차령의 서쪽 지맥의 끝이다. 산세가 빙 돌며 마곡사와 유구역을 만들었다. 그 골짜기의 마을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많고, 논이 기름지며, 목화, 수수, 조를 심기에 알맞다. 사대부와 평민이 한 번 여기 들어와 살게 되면, 풍년과 흉년을 잊는다. 생활이 넉넉하게 돼 다시 이사를 떠날 염려가 적다. 대체로 낙토(樂土)라 하겠다"고 했다. 조선의 예언가와 실학자가 이구동성으로 내포를 살기 좋은 곳으로 지목한 셈이다.

이중환은 내포의 위치도 소상히 밝혔다. 공주로 부터 200리 떨어진 곳에 가야산이 있는데 이 산의 앞 뒤 10현을 예부터 내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주변의 10현은 오늘날 당진과 서산, 해미, 예산, 대흥, 덕산, 홍성, 결성, 보령, 청양이다.

물론 위치에 대해서는 문헌 마다 다르다. 요즘은 여기에 신창과 아산, 직산, 천안, 평택까지 내포권역을 이룬다고 본다. 이처럼 내포의 범위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은 내포가 행정구역으로서의 법제적 단위가 아니었던 탓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범위가 확대된 경향도 있다. 15세기 '세종실록'에는 "내포 등처 10여 관(官)"이라는 구절이 나오지만 18세기 '영조실록'에는 "호서 내포 18읍"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내포 18읍은 조선 후기 홍주목사의 통제를 받는 18개 군현과 거의 일치한다. 권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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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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