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1957~)

가만히 앉아 숨쉬기

모든 구멍에서 나오는 구리고 비린 나를 들이마시기

제 못난 곳을 악착같이 감추어오다 감춘 사실마저 낱낱이 들키기

생긴 대로만 앉아 있어도 저절로 웃기는 놈, 비열한 놈, 한심한 놈이 되기

머리통에 피가 몰리는 기억을 꺼내 터진 뇌혈관 다시 터뜨리기

단단한 벽으로 된 입과 귀에다 깨지기 쉬운 간절한 말을 쑤셔 넣기

욕이 되려는 분노를 억지로 우그러뜨려 누르고 밝게 웃으며 대답하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녹여 나에게만 들리는 진한 한숨으로 바꾸기

숨구멍 막는 끈끈한 가래 같은 숨을 조심조심 뚫어가며 숨쉬기

긁으면 더 가려워지는 가려움, 긁느니 잘라내고 싶은 가려움을 긁어 키우기

고삐를 잡아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안 오는 잠을 강제로 자기

그냥 있기만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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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시를 배우는 학생들을 상대로 침묵 수업을 한다. 눈을 감고 5분간의 짧은 시간을 버티면 되지만, 평소 침묵에 서툰 아이들에게는 고역이 따로 없다. 한쪽에서는 킥킥킥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헛기침이, 몰래 눈을 뜨고 주변의 동태를 살피는 아이도 있다. "가만히 앉아" "그냥 있기만" 하는 게 뭐 그리 힘들까 싶지만, 막상 해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시야가 가려지고 소리가 사라져 고요한 마음상태가 되면 자기 자신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애써 아닌 척 묻어두고 살았던 "웃기는 놈, 비열한 놈, 한심한 놈"의 내가 눈에 들어오고, "악착같이 감추어오"던 "못난" 것들이 "낱낱이" 밝혀진다.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침묵의 가장 좋은 점은 자기정화의 효과에 있다. 스스로를 "구리고 비린 나"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화의 시작이다. 자신의 곪은 상처를 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삶이 그것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이 없다면 제 속의 "가려움을 긁어 키"워 놓고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하루에 한번 일기를 쓰듯 침묵의 시간을 갖자. "욕이 되려는 분노"도, "터져 나오는 비명"도 침묵으로 해소하고 나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시인·한남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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