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잃어버린 고대사

 삽교의 옛 지명을 살펴보면 잃어버린 내포의 고대사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충의대교에서 본 삽교천 모습과 1956년 예산 고덕면 구만포 어선 전경(작은 사진).  사진=충남도 제공
삽교의 옛 지명을 살펴보면 잃어버린 내포의 고대사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충의대교에서 본 삽교천 모습과 1956년 예산 고덕면 구만포 어선 전경(작은 사진). 사진=충남도 제공
충남은 대한민국 고대사의 성지다. 역사 이전의 문화와 유물은 땅을 파면 한반도 어느 곳에서나 쏟아져 나오겠지만 역사가 태동하던 무렵의 고대 유적과 유물의 신비로움은 단연 충남이 최고다. 충남의 고대사는 공주·부여의 백제문화와 예산·홍성 등 내포지방의 마한문화로 크게 나뉜다. 우리가 알고 배운 충남의 고대사가 백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 이 땅에는 백제 이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비록 지도자 계급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민초들의 향토색 짙은 언어와 생활양식은 수천년이 지나도록 충남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210만 충남도민들이 새 도청소재지인 내포신도시 출범과 함께 내포의 정체성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내포의 고대사는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다.

◇내포의 비밀, 삽교에 다 있다=충남의 서북부권인 아산만과 삽교천(揷橋川) 유역은 고대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곳이다. 바로 이 곳이 백제 이전의 충남, 마한문화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특히 삽교천 유역은 많은 토성과 지석묘, 선돌, 사찰 유허, 고분, 청동제 물품이 다수 출토된 곳이다. 이 삽교천을 중심으로 한 예산군 삽교읍 성리(城里)는 옛지명이 '궁(宮)마루·宮牟婁' 또는 '목시'라고 불렸다. 눈 여겨 볼 점은 궁이 있었던 곳과 함께 '목시'라는 이름이다.

바로 마한 연맹체의 최상위 지배층이었던 목지국(目支國)과 무관하지 않다. 지명 뿐만 아니라 이런 가능성은 이 마을 곳곳에서 발견되는 석기와 청동기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성리 마을 안은 선돌과 고인돌(支石墓)이 혼재해 있고, 청동기 유물도 다수 발견됐다. 일제 시대 행정구역이 통합되기 전까지 삽교읍 성리는 덕산 장촌면사무소의 소재지였고, 시장이 서던 제법 큰 마을이었다. 실제로 이곳은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를 도굴할 때 끌고 온 60톤 짜리 증기선 '그레타호'를 접안했던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의 맞은편 강 기슭이기도 하다. 백제 초기 불교가 중국 대륙을 통해 충남으로 유입될 때 아산만 삽교천을 통한 것도 이런 이유다.

문제는 삽교방조제 건설 이후 수로개설 등 각종 토목사업으로 이 일대 지형과 유물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점이다. 성리와 하포리 사이의 중간지대에 있었던 높이 2m 이상의 흙 언덕 유허는 마한 목지국의 역사를 밝혀줄 단서였지만 삽교천과 성리천 호안제방 축조 공사로 인해 성토용으로 반출돼 자취를 감췄다. 하포리 쪽에 '궁논(宮沓)'이라는 곳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고대 유적이 대책없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충남도와 예산군, 학계가 이제라도 삽교천 유역의 조사를 서둘러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삽교는 삽다리가 아니다=흔히 삽교의 지명을 얘기할 때 사투리나 지방 토박이말로 '삽다리'라고 부르는 줄 안다. 다리 교(橋)자를 그냥 푼 것이다. 마을 사람이나 예산 사람이나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 그리 알고 있지만 틀렸다. 가수 조영남씨가 지난 1972년 낸 '삽다리'라는 노래의 영향이 컸다. 조영남은 "내 고향 삽교를 아시나요. 맘씨 좋은 사람들만 사는 곳.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놓아 삽다리라고 부르죠"라고 노래했다. 유행가는 그대로 고유명사가 됐다.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할 때다. 조금만 책을 들춰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옛 덕산읍지(德山邑誌)에는 '사읍천(沙邑川)'이 있고, 이후 발간된 예산군지(禮山郡誌)에는 '삽천교(揷川橋)'가 있다. 결국 삽교의 '삽'은 '사읍'인 셈이다. '사'라는 마을인 것이다. 삽교천은 삽다리가 있어서 생긴 게 아니라 사읍천, 삽천, 삽내에 있는 다리일 뿐이다. 다리가 삽교 전체의 지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 삽교읍 성리와 하포리 부근의 삽교천을 '서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읍, 삽의 어원이 내포의 정체성이다=고대사에서 삽교의 위치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알기 힘들다. 대규모 토목공사로 훼손이 심각해진 지금은 더욱 그렇다. 천만다행으로 삽교의 여러 지명은 역사의 보이지 않는 고증을 가능하게 한다. 내포의 정체성을 더듬는 과정에서 삽교의 어원을 찾는 일이 소중한 것도 이런 이유다. 옛 지명(古地名)에서 '사(沙)'는 '새', '신(新)'과 동일하게 쓰였다.

향토사학자 박태신 선생은 '사읍'은 바로 '신읍(新邑)'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도읍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구읍(舊邑)'으로 '목시'라고 불렸던 성리를 지목했다. 성리에서 5km 거슬러 올라가면 금마천(金馬川)이 흐르는데 바로 이곳이 마한 목지국의 원류라는 것이다.

하지만 삽교의 어원을 찾는 길은 쉽지 않다. 박 선생은 "한국의 면단위 행정구역 가운데 삽(揷)이라는 문자를 쓰는 곳은 예산이 유일하다"며 "우랄알타이어계에서 ㅅ, ㅈ, ㅊ 은 공용되는 음이라는 점에서 삽, 잡, 찹 등의 음을 가진 지명을 찾아봤지만 단 한 곳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삽교 뿐만이 아니다. 아직 삽교읍 일원에는 의미있는 유적과 지명이 너무 많다. 삽교읍 수촌리의 '원반챙이' 마을과 2리의 '안다락미', 홍성군 홍북면 용산리의 '밖다락미' 등이 그렇다. 원반챙이 마을에는 넓은 평지토성과 선돌을 이용해 만든 큰 석불과 고인돌이 발견되고, 안다락미와 밖다락미 두 곳에서는 '능(陵)미'라는 거대한 분묘 3-4기가 남아있다. 이 지역에서 백제 이전의 토기 파편이 다수 발견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권성하 기자 nis-1@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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