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포 물길 '빛나는 역사·아픈 역사'

 대동여지도 중 내포지역 부분
대동여지도 중 내포지역 부분
1861년 김정호가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조선 후기의 내포지역은 지금과 많이 다르다. 바닷물이 삽교천과 무한천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올라옴으로써 넓은 평야를 이루고 신례원과 합덕 아래쪽으로는 넓은 개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물길을 따라 큰 배들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올라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 하구의 강경보다는 못했겠지만 내포는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거래되면서 충청북부의 수운과 교통중심지로 상당히 발전했던 곳이다. 이처럼 해만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수많은 포구를 형성하는 지형은 한반도의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들다. 이 지역에서 '안개'가 발달한 이유는 지역의 산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높은 산 대신 낮게 형성된 구릉들이 많고 그 사이에 생겨난 천들에 밀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잡은 내포지역은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다. 마한, 백제시대부터 선진문물을 받아 들여 내륙으로 전파하거나 일본으로 문화를 퍼뜨리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백제의 불교, 천주교의 유입도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가능했다.

또 바다와 내륙이 접하는 내포지역은 일찍부터 호남지역의 세금을 걷어 수송하는 조운선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이었다. 북쪽과 동쪽의 아산만, 서쪽의 서해바다 등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수많은 작은 천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가면서 '안개'를 형성해 육로와 수운의 결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호남지역에서 걷은 세금은 반드시 태안반도를 거쳐야 했고 이로 인해 내포와 한양 간의 수운은 일찍부터 발달했다.

발달된 수운으로 인한 아픈 역사도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휴게소로 잘 알려진 행담도는 오페르트 일당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다. 1868년 4월 18일 오페르트 일당은 680t 급 차이나호와 8t 급 소증기선 크레타호를 행담도에 정박시켰다. 오페르트 일당은 다음날 소형증기선만을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구만포(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 상륙한 뒤 덕산현청을 습격하고 오후 5시쯤 가야산 초입의 남연군 묘에 도착했다. 5시간에 걸친 도굴작업 끝에도 오페르트 일당은 남연군의 묘가 견고하게 구축돼 도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화려한 역사를 지닌 내포지역의 물길은 더 이상 찾아 보기 힘들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조선후기와 지금의 내포지역은 상당한 지리적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서해안 일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여러 방조제들 때문이다. 방조제들로 인해 가로막혀 버린 바닷물들이 더 이상 내륙 깊숙이 차 오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내포의 물길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강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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