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산 가야사 기구한 운명

 흥선군은 풍수가 정만인으로부터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한 터로 가야사 자리를 낙점받은 뒤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 자리에 이장했다. 사진은 남연군 묘.  사진=예산군 제공
흥선군은 풍수가 정만인으로부터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한 터로 가야사 자리를 낙점받은 뒤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 자리에 이장했다. 사진은 남연군 묘. 사진=예산군 제공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옥양봉 남쪽 기슭에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다.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한때는 인근의 수덕사(修德寺)보다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가야사는 종종 역사의 기록에 의해 전해지는데 '고려사'에는 1177년 3월에 공주 명학소의 천민 망이와 망소이가 난을 일으켜 이 절과 황리현(지금의 여주), 진주(지금의 진천) 등을 빼앗았다고 전해진다. 또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는 '이 절에 금탑(金塔)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철첨석탑으로 탑의 사면에는 감실을 만들어 석불을 봉안하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가야사는 화려한 역사를 뒤로하고 불타 없어져 버리는 운명을 맞는다. 조선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서다. 흥선군은 자신의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로 마음 먹는데 풍수가가 은밀히 알려준 곳이 바로 가야사였다.

흥선군이 가야사 자리에 터를 잡은 과정은 흥미롭게 전해진다. 그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풍수가 정만인에게 좋은 자리를 알려 달라고 부탁한다. 정만인은 사주와 관상에 능했던 인물로 흥선군의 용모를 단번에 파악하고 자신이 봐두었던 가야사 터를 흥선군에게 알려준다.

이 때 정만인은 두 곳의 터를 알려주는데 "한 곳은 '만대영화지지'로 만대에 걸쳐 부족함 없이 살 터였고 다른 하나는 '이대천자지지'로 2대에 걸친 천자가 나올 터인데 무엇을 고르겠습니까"라고 흥선군에게 물었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당연히 이대천자지지를 택했고 이곳이 바로 가야사였다.

터를 소개받은 흥선군은 자신의 계획을 재빨리 실행에 옮긴다. 1844년 가야사를 불 사르고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그 자리에 이장한다.

이후 정만인의 말대로 1863년 흥선군의 아들인 고종이 임금에 오르고 순종 또한 왕위를 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자 당시 승려들이 금동삼존불과 법당에 있던 금종과 석탑일부를 산속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충남 당진 면천면에 있는 영탑사(靈塔寺)에 그 유물이 전하며 이 중 금종은 1760년 2월 금 백근을 녹여 만들었다는 명문이 종신에 새겨져있다.

이후 흥선군은 가야사를 불태운 죄책감에 가야산 동쪽에 절을 지었고 부처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보덕사(報德寺)로 이름붙였다고 전해진다. 강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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