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산 출신 독립운동가
거사 당일 오전 11시 40분, 폭탄이 던져졌다. 식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이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 실명, 우에다 중장 다리골절, 시게미츠 공사 하반신 불구,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중상을 입었다. 의거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매헌은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에서 순국했다.
구한말 예산의 또 다른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김한종(金漢鍾·1883-1921)이다. 광시면 신흥리 출신인 그는 24살 때 홍주의병에 가담했다.
1917년에는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장에 임명돼 예산과 홍성, 청양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김한종은 군자금 모금에 탁월했다. 충청도 지부에서 발송한 고시문은 160여 통에 이르고, 군자금 모금액은 170만 원에 달했다. 책 1권에 1원이었던 당시 물가를 어림잡으면 1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군자금 모금에 반대하면 가차없이 척결했다. 1918년 1월 아산 도고면장(道高面長)인 친일부호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한 것도 그의 지시였다.
김 선생은 "(박용하는) 대한광복회를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연금을 낼 리 없으므로 이 자를 살해하여 다른 이들의 본을 보여야 한다. (중략) 그가 악인인 증거는 면장으로서 면민을 가혹하게 취급했고, 면서기의 사택을 몰수하여 자기의 사택으로 했고, 전 면장의 공금 소비를 교묘하게 꾸며서 옥사케 한 것이다"라고 했다.
선생은 대한광복회 조직이 탄로나면서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음력 7월 8일 38세로 순국했다. 강보람 기자 boram@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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