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호서지역 교통 요충지 예산

 추사 김정희 영정.
추사 김정희 영정.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內浦)를 일러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그 중 예산은 내포 지역 7개 시·군 중에서도 금북정맥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산이 겹치고, 무한천과 삽교천이 넉넉하게 흘러 천하 명당으로 손꼽힌 곳이다.

너른 내포평야(현 예당평야)는 밥맛 좋고 기름진 쌀과 오곡백과가 넘쳤고, 인근 산에는 땔나무가 지천에 널린 곳이니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은 절대 허언이 아니다. 끼니 걱정 하지 않아도 되니 이 마을의 이름이 예의(禮)가 산(山) 같은 곳인 것은 당연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처럼 내포의 정체성을 살펴보는데 예산군 만큼 좋은 곳도 없다.

◇의좋은 형제의 고장=20대 이상 한국인이라면 이성만, 이순 형제는 몰라도 '의좋은 형제'라면 누구나 다 안다. 의좋은 형제는 세종대왕 때 충남 예산에서 호장을 지낸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이야기다. 지난 1956년부터 2000년 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사랑받아 온 이야기다.

구전으로만 전해져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도 많았지만 지난 1978년 대흥면 상중리에서 우애비(충남도 유형문화재 102호)가 발견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한 때 지난 제7차 교육과정에서 국정교과서에서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누락되자 각계 각층에서 고등학교 전통윤리과목 국정 교과서에 다시 수록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력하게 대두됐을 정도로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시간, 장소와 무관하게 변치않는 것을 감안하면 의좋은 형제는 일화는 내포의 정체성에 중요한 테마인 셈이다.

◇우국 충절의 고장=예산은 호서지역 교통의 요지다. 공주와 아산, 당진, 서산, 홍성, 보령, 청양으로 이어지는 사통팔달의 교통망이 이곳에서 뻗어나간다.

외국으로 눈을 돌리면 중국 산둥반도에서 유입되는 수많은 문물이 아산만을 거쳐 선장포구를 지나 예산에 집결됐다. 넘쳐나는 문물은 자연스럽게 애향심과 애국심의 자양분이 됐다.

애국 애민의 정신은 나라가 어려울 때 빛을 냈다. 지금의 예당저수지 인근 봉수산은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임존산이다. 학계에서는 '임금이 존재(存)했던 산'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큰 산이다. 바로 이 산 위의 성이 백제 부흥 운동의 성지였던 임존성이다.

덕산면 출신으로 알려진 흑치상지는 도성 사비(부여)가 함락되고 의자왕이 당나라 소정방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연히 일어선다. 삽시간에 3만의 병사가 집결했고, 멀리 일본에서도 원병이 몰려왔다.

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 조에는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 사람으로 키가 7척이 넘고, 성품이 굳세어 달솔 겸 풍달군장이 됐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해 모두 항복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소정방이 무모하게 노왕(의자왕)을 가두고, 크게 침략하므로 흑치상지가 무리를 모아 임존성을 굳게 지키니 10여 일이 못돼 모여드는 무리가 3만여 명이나 됐다"고 적고 있다.

예산지역 인물들의 우국 충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병참 보급의 역할을 이뤄냈다. 보부상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의 점 조직으로도 활약한다.

◇세한도(歲寒圖)의 고장=국보 180호 세한도는 조선 선비의 절개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나무 네 그루, 집 한 채가 전부인 쓸쓸하고 황량한 그림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극도의 절제미와 거칠고 메마른 붓질로 그려낸 조선 문인화의 최고봉이다. 유배지에서 거주마저 자유롭지 못한 최고의 유배형인 '위리안치'까지 당한 추사는 그림에서 "세한연후 지송지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계절이 추워져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라고 일갈한다.

위리안치로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던 중국과의 통로마저 차단당했을 때 제자이자 역관이던 이상관이 서적을 전하고, 세상 이야기를 전한 것에 대한 외침이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늘 푸름에 비유해 선비가 갖춰야 할 의리를 역설한 것이다.

추사의 세한도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사람과 사람의 지켜야 할 도리를 단 한장의 그림만으로 강렬하게 보여준다. 추사의 세한도를 다시 한번 바라보자. 겨울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곧 무너져버릴 듯한 허름한 집 한 채. 좌우로 잣나무와 소나무 네 그루가 서있고 나머지는 온통 여백 뿐이다.

그런데 그림 한 구석에 찍힌 붉은 도장 글씨 네 글자가 가슴을 저민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잊지말자는 뜻이다. '의리'에 대한 감격스러운 마음을 담은 조선 최고의 선비가 오늘에 던지는 한 마디야 말로 내포시대 정체성의 핵심이다.

권성하 기자 nis-1@daejonilbo.com

강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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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은 예로부터 밥맛 좋고 기름진 쌀과 오곡백과가 넘쳐 '사람 살기 좋은 곳'이며,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예(禮)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예당평야 모습과 조선후기 대표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 고택(작은 사진).  사진=예산군 제공
예산은 예로부터 밥맛 좋고 기름진 쌀과 오곡백과가 넘쳐 '사람 살기 좋은 곳'이며,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예(禮)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예당평야 모습과 조선후기 대표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 고택(작은 사진). 사진=예산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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