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CEO를 만나다 - 유인순 도림평생교육원 원장

민족의 최대명절 '설'이 지났다. 설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뉴스 중에 며느리들의 '명절증후군'이 있다. 가족 모두가 모여 행복한 자리에서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 며느리들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적지 않다. 꼭 며느리가 아니더라도 아내나 딸, 어머니 등 여러 이름으로 돌봄과 가사노동을 떠 안는 여성들이 일생동안 자신의 꿈을 포기 않고 성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움을 쉼 없는 열정으로 이겨내고 차근차근 꿈에 다가 선 여성 CEO가 있다. 천안시 두정동에 위치한 도림평생교육원 유인순(58·사진) 원장이 바로 그다.

유 원장은 정부청사 이전으로 상전벽해가 된 현재의 세종시인 예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사업에 뛰어든 아버지의 수완으로 집안은 부유했다. 전화기가 부의 상징인 시절 유 원장의 집에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백색 전화기가 있었다.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들을 따로 여러 명 둘 정도로 가계 형편은 좋았다. 가세의 급격한 기욺은 유 원장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3 때 찾아왔다. 1960-1970년대 여성들의 혼수 품목 가운데 하나인 수동 재봉틀 판매 대리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전동 재봉틀 출현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급작스런 가난에 발목 잡혀 고교 진학도 불투명해졌다.

할머니는 칠남매의 맏이인 유 원장에게 가발공장에라도 나가 돈을 벌어 오라고 강권했다. 유 원장은 꿋꿋이 고교에 진학했다. 한번도 상위권을 벗어나지 않은 유 원장의 중학교 성적을 눈여겨 본 고교에서 3년 장학금을 약속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학금 수령 요건에 충족하느라 고교 때도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대학 진학은 집안 사정으로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고교 졸업과 함께 탈출구로 결혼을 감행했다. 예비 교사인 남편과 결혼으로 청주에서 시작한 시집살이는 고됐다. "농번기면 새벽녘에 나가 밤 늦도록 일 했다. 논에서 모를 내고 피사리를 하고 농약 통을 지고 다니며 농약을 했다. 정강이까지 빠지는 진흙 논에서 하루 종일 볏단을 나른 날이면 어금니를 깨물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집에 돌아와 발을 씻다가 발톱이 빠져 피가 나오는 걸 알았다. 겨울에는 나무도 하러 다녔다."

그런 생활에 적응 될 무렵 시부모 간병이라는 또 하나의 과제가 유 원장 앞에 놓여졌다. 시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몸이 됐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아 시어머니가 쓰러진 뒤 보름 후 시아버지까지 병석에 누웠다. 기약없는 간병생활의 시작이었다. 남편이 외동 아들이라 시부모 간병을 미룰 곳도 없었다. 초등학교 자녀 셋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터에 갓난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부모를 수발하느라 유 원장의 몸은 늘 녹초가 됐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씻기고 돌보는 간병생활은 시어머니가 쓰러진 지 백일여 뒤 돌아가시고 5년 뒤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매일 아침 전쟁처럼 나를 긴장하게 했던 모든 일들이 적막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은 저절로 자란 듯 중학생이 됐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듯 했다. 우울증으로 신경정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생각해보니 결혼 후 책 한 권을 변변히 읽어 본 기억도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라는 의사의 권유로 36세에 생애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고졸 학력의 30대 중반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농사일, 간병일 보다는 쉽겠다 라는 심정으로 보험회사 설계사직을 선택했다. 일은 예상보다 수월했다. 실적이 좋아 4년만에 정규직원에 발탁돼 소장으로 승진했다. 더 많은 급여를 주겠다는 경쟁 보험사들의 스카우트 제의도 잇따라 한 차례 직장을 옮겼다.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진학해 배움의 길도 재개했다. 해외 여행도 하고 그림 그리기도 배웠다. 보험 일이 더 이상 새로움을 안겨주지 못하자 '박수 받을 때 떠나라'는 말을 상기하며 15년의 보험 일을 과감히 정리했다.

어느 새 50의 나이. 보험사무실 대신 도서관을 찾았다. 하루 열시간씩 농사보다 더 정직하게 공부에 매진했다. 2008년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직업상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가고시인 직업상담사에도 합격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갖고 처음 대학 강단에 섰을 때는 목울대가 뻐근하게 아팠다. 꿈을 위해 노력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었다.

"보험회사에서 오랫동안 인력관리 업무를 맡으며 직업상담에 눈을 떴다. 혼자 배움에 그치지 않고 지식과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더 많은 이들이 적합한 직업을 찾아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도림평생교육원을 설립했다."

도림평생교육원을 설립·운영하는 한켠에서 공부도 계속했다. 사업실패에 대한 자탄으로 생애 후반을 불우하게 보낸 아버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노년의 질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시부모 모습을 떠 올리며 대학원에서 노인복지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2012년 8월 17일 호서대학교에서 노인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 원장이 57세가 되는 해였다.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렸을 때부터 대학교수가 내 꿈이었다. 대한민국에 교수가 1만여명이다. 내가 그 속에 못들 이유가 있는가? 전임교수가 돼서 65세에 당당히 정년퇴임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공부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윤평호 기자 news-yph@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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