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호 대전시 교육감

추운 날씨 속에서도 봄이 오는 소리는 들리고 있다. 겨울을 보내는 눈발 속에서도 꽃가지에 물 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시냇물 녹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봄을 맞이하는 우리 학생들의 등굣길에서 세상의 고뇌를 짊어진 성자(聖者)의 발걸음만큼이나 무거움을 느낀다. 일상의 사소함으로부터 수많은 웃음과 꿈을 만들어내는 이른 봄의 시인이자 낭만가였던 우리 학생들은, 이제 싸움에 임하는 검투사의 비장한 표정만큼이나 엄숙한 얼굴을 한 채 등굣길에 나서고 있다. 마치 학교가 즐거운 배움과 어울림의 동산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의 장(場)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삶에서 꿈을 발견하기도 전에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을 먼저 배워야 하는 세상은 아름다울 수가 없다. 루카치의 말처럼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의 행복을 대신하여 이제 세상은 낯선 타자로 학생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게다가 일부 부모들은 어린 자녀가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아바타(avatar)인 양, 자신의 어린 아바타에게 온갖 세속적 기능들을 두루 갖추도록 요구한다. 불쌍한 어린 아바타는 자신의 삶에서 단 한 번도 유용하게 써먹지 못할 수많은 기능들을 익히기 위해 사교육의 늪을 전전하고 있다.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만 하고, 남들보다 먼저 배웠다는 데 의의를 두는 강박의 시대에는 지식의 참다운 유용성을 검증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남'들보다 많고, '남'들보다 먼저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이렇다 보니 배움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무엇에 소용이 닿는지 헤아려 보지도 않고, 잡다한 지식들을 쌓아 두게 된다. 머릿속에 빈 공간이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남들보다 먼저 무엇으로든지 채워 넣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노자(老子) '도덕경' 제55장에 이르기를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 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릇의 효용이 있는 것이다. 방을 만들려고 방문과 창문을 뚫는데 방문과 창문 안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방의 효용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로움을 주는 것은 없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릇이 그릇이기 위해서 그릇은 비어 있어야 하고, 방이 방이기 위해서는 방은 비어 있어야 한다. 그릇과 방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릇과 방으로서는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그릇과 방의 잠재성은 그것이 비어 있을 때 발현될 수 있다. 비어 있는 그릇에는 밥도 나물도 담을 수 있고, 비어 있는 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다. 비어 있음으로써 그릇은 밥, 나물과 같은 타자와 관계 맺기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 밥그릇 또는 반찬 그릇으로서의 자신의 잠재성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방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와 반대로 그릇과 방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릇과 방은 고형화(固形化)되어 더 이상의 관계 맺기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기능을 잃게 된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내부에 여백이 있어야 가르침이 들어가고, 꿈과 희망도 그 가운데에 자리 잡을 수 있다. 비움이 있어야 수많은 사람들과의 직간접적인 관계 맺기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은 자신의 잠재성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신자유주의의 무한 가속도 경쟁에 지친 학생들은 악무한적(惡無限的)이고 소모적인 경쟁에서 벗어나 슬로시티(slow-city)에서의 삶을 갈망하고 있다.

학부모와 교육 공동체 모두가 나서서 학생들의 마음을 비워주고, 한편으로는 그 아픔을 보듬는 힐링(healing) 교육을 해야 할 시점이다. 학생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깨끗이 비워주어서 그들의 빈 그릇을 꿈과 행복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새 봄의 교육 화두, 힐링 교육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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