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구한말 홍주의병 활약상·의미

 홍주의사총에서는 매년 의병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홍주의사총 전경.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의사총에서는 매년 의병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홍주의사총 전경. 사진=홍성군 제공
충남도의 새 도청소재지인 홍성은 내포시대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다. 구한말 나라가 백척간두에 섰던 그 때, 분연히 일어서 우국(憂國)의 뜬 눈을 보여줬던 '홍주의병'은 훗날 일제강점기의 애국지사와 철군 군부독재시대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양심이다.

홍주의병은 지난 1906년 5월 26일에 쓰여진 홍주군수 윤시영의 일기에 남아있다. "밤에 정부에서 홍주, 남포 등지에 많은 백성들이 모여 의병을 일으켜, 성이 있는 읍내에 근거를 잡고 있으니, 그 기세가 매우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하게 번져 나가고 있다."

일주일 뒤인 6월 2일의 일기에는 일본군과 맞선 홍주의병들의 참혹한 모습이 나온다. "먼저 간 일본군부대가 지나 간 도로변에는, 우리 군사들을 일본병들이 마음대로 짐꾼으로 끌고가 농촌은 밭갈이를 못하고 있고, 장사하는 사람은 그 업을 행할 수 없어 눈에 선연하게 쓸쓸함이 느껴진다.(중략) 초 9일 새벽에 홍양성(홍주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이곳에서 처음 들었다. 사상자는 몇 백명인지 알 수 없고, 사방 수십리 이내까지 연기로 자욱하고, 잡힌 사람이 160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보니 몹시 참혹한 실정임을 알 수 있었다."

구한말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자 홍성 일대에서는 수 백 명의 의병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결집한다. 이들이 홍주의병이다. 홍주의병은 1차와 2차로 나뉜다.

1차는 일제의 침략행위와 개화정책 등에 반대해 일어났는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홍주의병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김복한 등을 중심으로 지방 유생들이 모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노약자와 독자를 제외하고 집마다 한명씩 응모하기를 청했다. 각 가정은 이를 피하지 않고 자진응모했다. 이후 홍성 광천에서 안창식의 모병운동을 시작으로 청양의 이봉학, 이세영, 김정하, 박창로 등이 사민 수 백 명을 모아 홍주부로 집결했다. 이러한 의병봉기는 을미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게 했다. 하지만 마무리가 아쉬웠다. 당시 의병에 참여했던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1895년 12월 4일 김복한을 비롯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 등 지도부 23명이 체포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서울로 이송된 이들은 한성재판소로 부터 김복한 유배 10년,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은 곤장 60대에 처해졌으나 고종의 명령으로 전원 사면됐다. 이렇게 1차 의병은 유야무야 됐다.

2차 홍주의병은 1906년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안병찬 등과 의병을 조직해 홍주성 전투를 치른 것을 말한다. 1차의병의 중심축이었던 김복한과 이설은 을사 5적의 매국행위를 맹렬히 성토했고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권을 듣고 이는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며 상소를 올리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한편 1차 의병의 또 다른 중심세력이었던 안병찬, 채광묵 등은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의병봉기를 추진했다.

부대편성을 마친 뒤 1906년 3월 15일 광수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를 시작했다. 두 달 간 훈련을 하며 세를 확장한 의병대는 일본과의 전투에서 얻은 구식화포 2 문을 앞세워 홍주성을 공격한다. 의병의 거센 공세를 이기지 못한 일본 헌병들은 북문을 통해 덕산 방면으로 도주하고 의병들은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한다. 이후 일본은 지역 헌병과 경찰을 주축으로 홍주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의병들의 저항으로 번번이 패했다.

잇따른 패배로 일본은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 기관총 등을 동원해 3일 간의 격전을 벌인 끝에 겨우 의병을 제압했다.

홍주 2차 의병은 수 백 명의 사상자를 내며 단일전투로는 전국 최대의 희생자를 내며 의병이 폭발하는 계기가 됐다. 이 전투로 인해 의병지도자들은 유배당하게 됐으며 홍주의병 활동을 하며 희생된 수 백명의 의병들의 유해는 현재 홍주의사총에 묻혀 있다. 홍주의사총은 1949년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고 지난 2001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매년 5월 30일 의병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김달호 기자 daros@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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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홍주의병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홍주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모습.  사진=홍성군 제공
구한말 홍주의병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홍주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모습. 사진=홍성군 제공

김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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