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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춘추] 설날을 지내고 나서

2013-02-12기사 편집 2013-02-11 21: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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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 문학비평가

'민족 대이동'이라고 부르는 설 명절이 지났다. 갑자기 닥친 겨울 한파와 얼어붙은 경제도 고향을 향한 발길을 막지는 못하였는지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귀성객 때문에 고속도로는 크게 정체되었고 기차역이나 터미널은 선물 꾸러미를 든 인파로 붐볐다. 텅 비어 있던 고향의 골목엔 모처럼 고향을 찾은 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제 모두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일을 시작하리라. 살을 에는 겨울바람을 막느라 옷깃을 세운 채 가족에게 줄 선물을 가득 들고 즐겁게 고향을 찾아갔다가 부모님께서 싸주신 쌀이며 콩이며 팥이며 메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던 짧은 연휴. 지금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아쉬움과 함께 그 싱그러운 여운도 가득하리라. 그런데 길이 막혀 많은 시간을 길에서 허비했어도 고향 집에 다녀온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하고 무언가 삶의 밑천을 잔뜩 짊어지고 왔다는 행복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고향을 찾기 전보다 훨씬 의욕과 자신감에 차 있는 이것은 또한 어디에서 오는가.

고향은 우리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언제나 그리움이 달려가 머무는 곳이다. 타향에서 고향을 생각하노라면 그곳은 늘 부드럽고 감미로운 느낌을 주는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며 유년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앞산에서 해가 떠올라 그 햇살이 강물에 닿으면 영롱한 물결이 눈이 부시던 아침이다. 산과 들을 쏘다니던 어린 시절, 얼음을 지치다가도 누군가가 멀리서 방패연을 날리면 마구 달려가던 구릉이 있는 한낮이다. 날이 저물어 차가운 별이 쏟아질 때 어디선가 물총새가 깃털을 떨어뜨리고 날아오르던 저녁이다. 그래서 그 고향에는 사나운 바람이 사방에서 창문을 흔들어도 용감하게 우리를 지켜주던 집이 있다. 비록 작은 집이지만 저녁을 짓는 연기가 굴뚝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고 반찬을 만드는 어머니의 도마 두드리는 소리가 우리를 불러들이던 곳이다. 다시 돌아가지 못할 순간이어서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까닭은 언제나 뛰어나와 우리를 반겨주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라도, 세상에서 버림받아 내쳐진 탕아라도 그저 돌아와 주기만을 고대하며 늦도록 불 밝히고 대문간을 서성이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돌아오지 못하는 우리를 기다리는 늙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은 돌아가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는 날이지만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그동안 세파에 부대끼며 받은 상처를 서로 어루만져 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날이 설날인 것이다. 그곳에는 눈 내리는 날의 절절 끓는 온돌방 아랫목 같은, 가슴을 데이는 사랑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살이가 점점 힘들어지고 각박해질 때마다 그것을 이길 힘을 얻기 위하여 고향을 찾아가는지도 모른다.

설을 맞이하여 우리는 강가 버들개지에 푸르게 봄물이 오르듯 우리의 핏줄에 뜨겁고 격렬한 새 피를 돌게 하려고 그 먼 고향 길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아득한 지평선 위 우뚝 솟은 나무처럼 우리의 가슴을 마구 흔드는 건 언제나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꿈임을 알게 하려고, 우리는 생의 원점인 고향으로 순례를 다녀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내일을 뒤흔드는 지진이며 계시 같은 생의 자금을 받아오려고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투자할 수 있는 두둑한 생의 자금을 받아왔으니 멀리서 다가오고 있을 새봄을 기다려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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