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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춘추] 그곳에는 옛이야기가 있다

2013-02-05기사 편집 2013-02-04 21: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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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 문학비평가

꽃 피는 봄이 온다는 입춘이 지났다. 이어서 겨울이 지나 비가 오고 얼음이 녹는다는 우수가 오고,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정도로 날씨가 풀린다는 경칩이 올 것이다. 이 우수와 경칩 사이에 초·중·고 학생들의 봄방학이 시작된다. 그러면 초·중·고 학생 그리고 어쩌면 대학생까지도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사는 친가나 외가에 보내 보자. 친가나 외가가 아주 깊디깊은 산골이나 바닷가 마을에 있다면 더욱 보내야 한다. 그곳에는 바로 그분들의 입을 통해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옛이야기는 간장이 서늘할 만큼 무섭고 두렵지만 기지와 재미가 넘친다.

시인 서정주의 외가는 해일이 밀려오면 앞마당에 망둥이와 바닷게들이 여기저기 펄떡이는 바닷가 마을에 있었다. 소년 서정주는 외가가 집 가까이에 있어서 그곳에 자주 놀러 갔다. 낮에는 망둥이와 바닷게들을 찾아 신바람이 나서 뛰어다녔고, 밤에는 집으로 들어온 바닷물을 바다에 나갔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후신으로 생각하여 얼굴이 상기되곤 하던 외할머니 곁에서 옛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국문 소설을 많이 읽고 있었던 외할머니는 소년 시인에게 소설뿐만 아니라 동네의 도깨비 집, 그 집의 도깨비 마누라 이야기 등등 여러 민화나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는 소년 시인에게 여러 신화적 상상력을 키워주며 후일 신라 정신을 깊이 탐색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신라초'라는 시집과 '질마재 신화'라는 민간 설화를 차용한 시집을 발간하게 하였다. 외가가 바닷가 마을이라는 지리적 조건, 그리고 외할머니가 들려주던 여러 이야기가 시인으로 하여금 가장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정서의 원형을 시로써 표현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아이들이 인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호기심 넘치고 창조적이길 바란다면 외가나 친가로 보내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인정 많고 유난히 수다스러운 할머니가 계신 곳이라면 적극 권해야 한다. 훌륭한 문학 작품들 중엔 그분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가 중요한 씨앗이 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백석, 박완서, 법정, 나태주, 허영자 등 유명한 문인들이 자신들의 글에서 그러한 고백을 하고 있다. '내' 아이가 오전 10시의 기차표를 바라보며 쭈그리고 앉아 시골에 있는 외가나 친가로 가는 여행 가방을 꾸리는 일을 적극 도와야 한다. 살 길을 찾아 너도나도 도시로 떠나 텅 비어 가는 시골을 지키고 있는 외할머니와 할머니들은 바로 우리네 정신의 씨앗을 지키는 외로운 파수꾼이다. 수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고 있는 디지털 시대이지만 그분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이자 정의이며 여러 역사적 위기를 현명하게 대처해 나왔던 지혜, 용기, 패기이다. 그분들이 더듬거리며 들려주는 옛이야기 속에는 오직 지식과 기술을 우상으로 여기며 달려가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정한 미래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손녀·손자는 외할머니 할머니가 들려주는 구수한 옛이야기 속에 빠져 새처럼 하늘을 날기도 하고 구름의 파편들 위에서, 수평선 아득한 먼 바다에서, 들판에서 오래 서성일 것이다. 그리고는 사과 씨앗에서 사과밭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미처 꿈꾸지 못한 일들에 도전하는 것이 일생을 두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기며 이 땅을 당차게 이끌어갈 훌륭한 동량으로 거듭날 것이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이야기는 무수한 상상력으로 초록빛 봄을 그들의 새파란 영혼 속에 가득 채워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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