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음악가 이야기 - 토스카니니 [1867 - 1957]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3.25 -1957.1.16)는 어느 때부터인가 자신이 베르디와 같은 나이인 87세에 죽을 것이라는 미신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베르디 보다 2년이나 더 살았다. 그리고 죽기 2주 전까지도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어떤 쇠퇴의 징후가 없었다. 토스카니니의 기억력은 거의 불가사의에 가까웠으며 이에 대한 에피소드는 넘쳐난다.

그 중 한 예로 젊은 피아니스트 마리오 델리 폰티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델리 폰티는 1955년부터 미국 순회연주를 다녔는데 그러던 중 토스카니니를 여러차례 방문하여 음악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위해 연주를 하였다. 1956년 역시 크리스마스 다음날, 폰티는 토스카니니에게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그에게 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프레스코발디의 제자로, 묻혀 있던 17세기 작곡가 미켈란젤로 로시의 소품을 피아노로 편곡한 작품을 연주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이 작품의 제목을 말하자 즉각적으로 토스카니니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 작품은 두 가지 판이 있지만, 둘 다 네 번째 마디에 틀린 부분이 있지." 그리고 그는 틀린 곳을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설사 그가 기억하는 데는 극도로 비범한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도대체 언제 그에게 이런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음악의 레퍼토리에 이르기까지 샅샅히 다 통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들 작품을 건성으로 흝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을 충분히 연구하고 어떻게 연주돼야 할 것인가까지 속속 들이 알고 있다니!'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이렇게 정확하고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 경우는 그 어떤 음악사에도 그 예를 찾기는 어렵다.

토스카니니의 지휘자 데뷔는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1886년 6월 30일 19세의 젊은 토스카니니가 첼리스트로 연주하고 있던 로시 오페라단과 오케스트라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오페라 '아이다'를 공연할 때다. 당시 악단과 지휘자는 대립하고 있었고 가수들은 파업을 선언해 원래 지휘 예정이었던 현지에서 섭외한 지휘자 레오폴도 밍게스가 지휘하는 것 역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급히 섭외한 카를로 수페르티와 악단 사이에 막이 오르기 전에 언쟁이 일어나면서 화가 난 지휘자는 그냥 홀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급히 공연을 하기 위해 악단 측은 부지휘자 아리스티데 벤츄리를 무대에 내보냈는데, 그 마저도 청중의 거센 야유로 물러나야 했다.

이때 몇몇 단원들이 단무장에게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 토스카니니가 악보란 악보는 모조리 외우니까 그에게 지휘를 시켜보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해서 토스카니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로서 데뷔 무대를 가지게 된다. 1막이 끝나고 그 거침없는 지휘에 넋이 나간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쳤다. 브라질에서 느닷없이 지휘자로 데뷔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온 젊은 토스카니니는 그 해 토리노에서 카탈라니의 오페라를 시작으로 지휘자의 길에 들어서 맹렬한 질주를 시작한다.

이상철 순수기획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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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스카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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