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문학비평가

서늘하고 환한 겨울 달빛이 책상으로 내려앉는 저녁 무렵, 책상을 정리하다가 툭 떨어지는 것이 있어 보니 낡은 동전 지갑이었다. 얼마 전 내 낡은 동전 지갑을 보고 새로 사 주고 싶어 선물한다는 친구 덕으로 내 것은 이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그 후부터 저 낡은 동전 지갑을 쓰지 않고 한쪽에 버려두었는데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날 잊었느냐고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여 년 전에 가방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동전이 싫어 산 조그만 진회색의 동전 지갑이다. 그것을 파는 데가 없어 대전의 지하상가를 한참 헤맨 끝에야 어렵게 샀는데 이후부터 매번 나랑 외출했다. 세금을 내고 잔돈을 거슬러 받을 때나, 물건을 사고 잔돈을 주게 될 때에도 나랑 함께 있었다. 그리고 자판기 커피를 먹고 싶어 동전을 챙겨갈 때도 함께였다.

작고 앙증맞은 비닐 동전 지갑은 군데군데 낡은 흔적이 역력하다. 그 크기가 가로로 8㎝ 세로로 5㎝ 정도인데 여기저기 긁히고 터져 있다. 무엇엔가 날카로운 것으로 베여 갈라진 자국도 있다. 지갑을 여닫는 부분에는 도금도 다 벗겨져 나가서 행색이 마치 얼굴이 쪼글쪼글한 할머니 같다. 그러나 하찮게 보이는 그것은 때로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지난해 어느 날엔가는 서울에서 예식장에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요금을 꺼내려다 보니 그만 깜박하고 장지갑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었다. 큰일 났다 싶어 혹시나 하여 핸드백을 살폈는데 다행스럽게도 동전 지갑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른 동전을 헤아리며 기사님에게 "기사님, 이 동전만큼만 가요" 했더니 "걱정하지 말고 가고자 하는 데까지 태워다 드리겠다"고 해서 무사히 결혼식장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 기사님도 고맙지만, 이 동전 지갑 덕에 내가 시댁의 중요한 결혼식에 무사히 갈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무척 고맙다. 어찌 보면 그때 이 동전 지갑은 나에게 은인이 되었던 셈이다.

동전 지갑 신세를 진 것이 어디 한두 번이랴. 건망증이 많아 내가 자주 장지갑을 놓고 가는데 어디를 가더라도 매번 위기에서 구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동전 지갑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부러 그렇게 의식한 것이 아니어도 이 동전 지갑 안에는 늘 500원짜리 동전을 잔뜩 채워두었다. 낡은 옷이 좋다고 예찬하던 시인이 문득 떠오른다. 그 시인은 시에서 엄마가 사오는 새 옷이 크고 싫어서 매번 안 입는다고 하다가 엄마한테 매를 맞는다고 하였다. 새것은 늘 그렇듯이 뻣뻣하다. 뻣뻣하다는 것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경직된 상태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물론 어떤 물건에 첫눈에 반했어도 그 새것과 친해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다 그렇다. 서로가 다른 개성과 가치를 가진 존재들인데 만나자마자 어떻게 상대방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서로에게 깃든다는 것, 그것은 함께 낡아가면서 서로의 숨소리와 눈빛을 듣고 볼 줄 알아야 가능해진다. 어떤 것이나 '내' 곁에서 낡아간다는 것은 '나'를 믿어 주고 지켜봐 주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낡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효력이 강한 진정제 같은 것이 되어 주는 것이며 수많은 별이 떠 있는 달밤이 되어 주는 것이다. 상대를 편안하게 하고 기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새파란 달빛을 뒤집어쓰고 친구가 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이 동전 지갑. 20여 년을 나와 함께 다녔으니 좋은 친구였다. 아니 자상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고맙다. 그대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