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화(1974~)

빨강 사과가 열리고 갓 낳은 아이가 자라고 아이는 빨강 사과 속에 숨고 곱사등이는 등에 빨강 사과를 짊어지고

사과가 파래지고 파란 잎사귀가 몰려와 둥지를 짓고 아이는 입을 벌려 지지배배 지껄이고 곱사등이의 입술 위로 파란 사과가 구르고

아이는 사과를 등 뒤에 숨기고 별 가득 베어 문 아이의 입에서 곱사등이의 사과가 열리고 사라진 사과는 푸른 하늘 은하수가 되어 흐르고

시인은 곱사등이의 등에 사과를 심고 곱사등이는 사과처럼 아이처럼 아삭거리고 시인의 손가락이 더듬더듬 사과를 쓰다듬고

전시회의 사진 한 장이 이 시를 쓰게 했다면, 이 시는 또 우리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현실에 기반을 둔 사진을 언어로 재해석해내면서 풍경 안에 감춰진 풍경까지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시의 상상력이 작용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단단히 묶어두었던 관념들은 모두 자유로워진다.

미래로만 흘렀던 시간이 역행을 시작하는가 하면, 개별적인 존재들이 서로를 받아들여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이 시의 새로움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시에서 인물들이 엮어가는 관계를 통해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 등장하는 '곱사등이'와 '아이'는 각각 '늙음'과 '젊음'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고정관념 속 존재들이 아니다. 둘은 '사과'를 통해서 끊임없이 서로의 모습을 교환하며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푸른 하늘 은하수가 되어 흐르'는 사람의 마지막 생을, '곱사등이'는 '사과처럼 아이처럼 아삭거리'는 사람의 새로운 생을 떠올리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서로를 이해하는 유기적인 관계, 그것이 바로 시인이 '쓰다듬고' 싶은, 만들어가고 싶은 풍경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관계 회복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역에 의해, 세대에 의해, 성별에 의해 분열된 관계들은 갈등만을 초래한다. 서로의 '사과'를 나누고, 이해할 수 있게 될 때 새로운 세계의 꿈이 열릴 것이다. 시인·한남대 강사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