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지난 연말 종말론이 기승이었다. 기승을 넘어 온 세상을 뒤덮을 태세였다.

종말론을 남의 일로 여기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여기에서 끝'이라고 하는 절망의 삶에 부닥쳐 있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종말론과는 한 걸음, 아니 열 걸음은 떨어져 있는 삶을 살아간다. 그만큼 종말론은 '나'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것인 양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나'는 언론매체들이 경쟁적으로 퍼다 나르는 종말론에 대해서는 정말로 무관심하다. '한때' 기승을 부리는, 그러다 사그라지고 마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와는 아득히 먼 나라의 어떤 허무맹랑한 이야깃거리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실은, 기독교의 종말론이든 아니면 불교의 말법론이든, 지금 우리 사회를 혹은 전 세계를 횡행하는 이른바 '종말론'이라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어떤 이야기이다. 불교의 말법론이든, 기독교의 종말론이든, 그것은 명백히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과 함께 더 나은 삶에 대한 그치지 않는 인간적인 열망을 담고 있다.

종말론이나 말법론에는, 적어도 그 본연에서 말한다면, 거기에는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체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것은 절망적인 현실에 부닥쳐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담아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것이 목적했던 것은 절망적인 현실에 부닥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개인'으로서는 더 이상 감당해낼 수 없는 어떤 극단적인 사태에 이르렀을 때,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절망적인 현실이 '나' 때문에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나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것일 때, 그 사회가 더 나은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러나 어디까지나 절박함이다. 절박함에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절망에 따른 체념과 자포자기와는 다르다. 절박함에는 여전히 이루어야 할 세상, 이루고 싶은 세상이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그 이루고 싶은 세상 이루어야 할 세상이 바로 한편으로는 극락정토이고 한편으로는 천국이라 불리는 것이다.

물론 '천국'과 '극락정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천국'은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실현된 세상이고, '극락정토'는 모든 것을 바라는 대로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세상이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더 이루어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세상이고, '극락정토'는 이루어야 할 것을 이룰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주어지지만 결과를 성취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는 그런 세상이다. 물론 노력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의 세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어느 쪽이든, 요즈음 횡행하는 종말론은 은연중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 세상'을 말한다. 물론 그 대가는 현실의 삶에 대한 철저한 포기이다. 그러한 체념의 삶, 절망의 삶에 대해 우리는 혀를 찬다.

그리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종말론에 휘둘리는 삶들은 '그들'의 문제로 치부되어진다. '우리'가 아닌 '그들'의 문제, '이상한 인간들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들만의 문제일까? 이 사회에 횡행하는 종말론의 상당수는 사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어처구니없는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그런 것들'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양산하고 용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외면된다. 바로 우리 자신이 어이없는 종말론을 양산하고 허용하는 주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타인의 삶, 자신의 삶에 대한 무관심이 종말론을 용납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 관심의 바깥에 버려진 자들이, 성공적으로 사회구조에 편승하지 못한 자들이, 그나마 기대어 볼 것이라고는 '종말론'을 내세우며, 거창하게 '현실을 외면한 채 기도하고만 있으면' 세상은 내일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떠드는 그들밖에는 없는 것이 아닌가?

종말론의 울타리 안에 미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은 사회적 안전망의 마지막 테두리였던 '종교'라는 것이 '종교인'이라는 것이 본연의 자세를 망각했을 때 내팽개쳐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새해의 벽두에, 우리는 간절히 열망해야 하리라, 제발 올해는 나의 무관심이 다른 이들의 아픔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내 이웃과 내 가족에게는 바로 내가 사회적 안전망의 마지막 테두리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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