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민 충남역사박물관장

충청도가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연기군 전체, 공주시와 청원군의 일부가 합쳐진 세종시가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차원에서 공모를 거쳐 세종시라 이름하였고,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차원에서 한글을 우선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도로명과 행정동명을 순우리말로 지었다. 새로운 창조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속담이 전한다.

그렇다면 연기군의 역사와 문화는 청산의 대상일까? 세종시가 과연 황무지에 세워진 미래의 도시일 뿐인가? 단지 도로명과 동명일 뿐인데, 과민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종시에 건립되는 박물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만으로 채울 수는 없고, 청소년들에게 이 지역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제 다시 한 번 세종시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계기임은 분명한 듯하다.

역사지리학적으로 볼 때, 세종시는 금강 뱃길의 종착점이었는데, 우리는 벌써 경부선 철도를 부설할 당시 물자는 배에 실어서 부강까지 거슬러 올라왔던 사실조차 잊은 듯하다. 100여 년 전만 해도 부강포구에 이르는 세종시 지역의 강변에는 합강정을 비롯하여 금강 8정으로 꼽히던 누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합호서원을 비롯한 서원도 여러 곳이다. 모두 물길을 조망할 수 있는 빼어난 위치이다. 세종시는 또한 1번 국도가 관통하는 곳이다. 개미고개 부근을 거쳐 조치원을 지나서 나성리에서 금강을 건너는 길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에는 쌍전리 정좌산과 남면 원수산 일원에서 합단적과의 전투가 있었고, 국무총리실 바로 뒤편 원수산 자락에는 합단적에게서 항복문서를 받았다고 전하는 항서바위가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연동면 속칭 동진평에서 영규대사가 승병 500명을 이끌고 왜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고, 한국전쟁 때에는 개미고개와 대평리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있었다. 모두 남도로 향하고 또한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시와 연고가 깊은 인물도 적지 않다. 이도는 고려 건국기 금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할 때 태조 왕건을 도왔고, 그 공으로 전의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성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이성은 그가 살던 곳이며, 그 안에는 1841년에 세워진 이태사유허비가 있다. 그의 묘역은 전의면 유천리 양안이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비는 1578년에 건립된 것이다. 부안 임씨의 중시조 임난수는 절의를 지켜 세종대왕으로부터 나성리 일대를 사패지로 받았던 인물이다. 그에 얽힌 여러 유적이 전하는데, 그의 아들 임목이 건립한 나성리 독락정은 금강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그곳은 또한 백제 때의 토성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며, 조선 후기에는 금강 내륙지역의 해산물 유통을 위하여 국가에서 점포를 개설했던 곳이고, 또한 한국전쟁 당시에는 금강방어전투의 현장이다.

세종을 보필했던 김종서와 사육신인 성삼문과 박팽년도 이 지역과 인연이 깊다. 장군면 대교리에는 김종서와 함께 조부와 선고의 묘역이 전한다. 1748년 건립된 묘비에는 이곳이 순천 김씨 집안의 세장지지라고 되어 있다. 박팽년의 조부 박안생은 순천 박씨의 입향조로 조선이 개국한 뒤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전의면 관정리에 한석정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은거하였다고 한다. 옛 기록에는 박안생이 살던 박동이 전의현 북쪽 7리 떨어진 곳이라고 되어 있다. 현재 조부 박안생의 묘역은 송정리에 전하지만, 아버지 묘소는 실전 상태이다. 성삼문의 5촌 당숙 성희는 단종의 복위에 함께 연루되어 귀양에서 풀려난 후에 금남면 달전리에 터를 잡았다. 이후 그의 아들 성담년과 손자 성제원으로 이어지는 가계에서 성삼문의 봉사손이 정해진다. 성삼문을 모신 사우가 그곳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기호학파의 낙론계 명현 임헌회와 그의 제자 전우가 연기에 자리 잡는데, 덕성서원은 그를 기리는 서원이다. 경술국치에 절명사를 짓고 자결한 오강표는 그의 문하의 인물이다. 이 외에도 충청 5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유태 선생의 묘역이 있으며,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의 아버지 이중휴와 부인의 묘소도 고정리에 있다.

다른 문화유산들도 적지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찰 비암사와 연화사, 강다리기라는 독특한 형태의 민속놀이 등이 전하는 곳이 세종시이다. 다만 아직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옛것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새로운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최소한 지역의 문화유산을 보존할 박물관, 청소년을 가르치기 위한 기초적인 연구, 그리고 문화유산에 대한 정비사업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지역의 역사와 미래의 비전이 함께 어우러지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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