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층이 본 시대

얼마전 사활을 걸고 준비했던 대기업 공채의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탈락할까봐 마음 졸였다가 전형 통과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며 희비가 엇갈린 시간을 보냈다. 4차에 달하는 전형을 힘겹게 통과하는 동안 점점 `이번엔 정말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뜬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한 순간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함께 절망감이 밀려왔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고 꼬박 2년 동안 대기업 취업에만 매달려왔는데 남은 건 `취업실패자`라는 꼬리표 밖에 없었다.

하루를 꼬박 울고 잔뜩 부은 눈으로 친구를 만났다. 일찌감치 지역 중소기업에 입사한 친구는 `박봉`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꼬박꼬박 밥값을 내주곤 했다. 그리고는 꼭 한마디씩 덧붙였다.

"너라도 좋은 데 들어가서 나중에 비싼 밥 사줘. 작은 데서 시작해서 이직한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지금은 좀 힘들어도 조금만 더 고생해서 좋은 데서 시작하는 게 나아. 그래야 돈도 모으지."

친구 딴에는 조금만 더 힘내라고 하는 소리였지만 마음만 더 무거워졌다. 좋은 일자리는 대부분 수도권의 대기업에 몰려 있고 그 문턱은 턱없이 높기만 한 현실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지방 대학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방에 살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취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뒤돌아보면 대학에 다닐 때도 마음껏 놀아본 적이 없었다. 취업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섣불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여름방학에는 배낭여행 대신 토익학원을 다녔고 휴학기간에는 남들 다 가는 어학연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넉넉한 가정환경 덕분에 어렵지 않게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쉽게 스펙을 쌓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상대적인 박탈감도 느꼈지만 남들만큼 스펙을 쌓기 위해서는 가정환경 운운하며 푸념할 겨를도 없었다.

공인영어성적을 얻기 위해 어학시험도 수차례 치렀다. 매월 많게는 20만원까지 나가는 응시료가 버거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취업에 필요하니까.

3학년을 마쳤을 무렵 불면증이 찾아왔다. 점점 더 커지는 취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밤마다 잠을 설쳤다. 당장 학교를 휴학하고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이유없는 공백기간이 있으면 취업할 때 불리하다는 말이 발목을 잡았다.

대학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다. 입사시험과 겹친 탓도 있었지만 취업도 못한 채로 졸업식에 가면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들리는 말에는 좋은 곳에 취업한 동기녀석들만 졸업식에 왔다고 했다.

올해 나이 28살. 이젠 부모님한테 용돈을 타 쓰기도 민망한 나이다. 더 이상 바늘구멍 같은 대기업 취업에만 매달릴 겨를이 없었다.

무엇보다 간신히 커트라인을 넘어선 어학성적과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스펙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마음 한 켠을 짓눌렀다. 이제는 정말 눈높이를 낮춰서 라도 취업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취업이 늦어지는 만큼 결혼은 커녕 연애를 하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대학 때부터 3년간 만났던 여자친구와는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진 지 오래다. 2살 연하였던 여자친구도 대학 졸업 후 취업에 매달리느라 만나는 날이 뜸해졌고 매번 만날 때마다 몇 만원씩 들어가는 데이트비용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여자친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요즘 세대를 연애, 결혼, 자식을 포기한 삼포(三抛)세대라고 하잖아요. 그 말이 정확한 것 같아요. 언제 취업할 지 알 수 없는데 연애하는 건 사치처럼 느껴지고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한 생각까지 멀어지는 거죠. 요즘은 독신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취업 후 결혼자금을 모으는 데도 수년이 걸릴테고 육아에 들어가는 돈도 한 두 푼이 아니라는 데 차라리 혼자 사는 게 편하지 않을까요?"

지난 해 결혼한 2살 터울의 친누나도 당분간은 아이를 갖지 않을 계획이라고 선포했다. 어짜피 남자 혼자 버는 돈으로는 육아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 자신이 직장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전에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취업준비생 이석훈(가명) 씨는 취업에 대한 불안감과 결혼에 대한 막연함을 이렇게 털어놨다. 그에게 있어 `청춘`이라고 표현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청춘에 어울리는 자유를 만끽하기에는 취업이라는 무거운 과제가 항상 그를 괴롭혀온 탓이다.

"언젠가는 취업이 되겠죠. 그렇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주변 친구들을 보면 아무리 좋은 데 취직했더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라고요.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취업을 준비하긴 했지만 이게 정말 제가 원하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이 없어요. 다만 패배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게 두려운 것 같아요. 한국은 진 사람에게 더 냉혹한 사회니까요."

김예지 기자 yjkim@daejonilbo.com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