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년층이 본 시대

빈곤에 허덕이던 35년 전을 떠올려본다. 악취가 심한 개천 주변의 12㎡(5평)짜리 단칸방이었다. 희귀병인 결절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여동생 얼굴에는 붉은 반점이 가득했다. 가끔 여동생의 머리맡엔 어른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나왔지만 익숙한 듯 문고판 책으로 벌레를 짓눌렀다. 허기진 배를 웅크리는 늦은 밤, 어머니가 팔다 남은 인절미 대야의 누런 콩고물을 꾹꾹 눌러 끼니를 해결했다. 신문지로 도배를 한 벽면의 아버지 영정사진은 무책임한 표정이었다.

17세 나이에 풍운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장은 사치였다. 마을 큰 손이던 박씨네를 찾아 낮에는 용접공 보조로 일 했다. 밤에는 영화관 필름실에서 보조로 일했다. 삶은 늘 보조였다. 여동생의 약값을 벌어야 했고, 어머니의 짐을 덜어 줘야만 했다.

22살의 봄날 아내를 만났다. 시장 닭 한마리를 싸서 등산 데이트를 즐겼다. 점심시간 백숙을 끓인 후 먹다 남은 국물은 집으로 들고 와 죽을 써 먹었다. 국물이 조금 더 남으면 다음 날 아침으로 재활용했기에 늘 맹탕이었다.

두 아이를 낳고 아버지라는 무거운 이름을 단 후 30년이 지났다. 용접공 보조 출신의 이력으로 현재 52세 나이로 지역 중소 철강회사 상무자리에 앉게 됐다. 연봉은 5000만원이다. 5000만원의 연봉을 쌓아 올리기까지 5000만원이 넘는 대출을 두 차례 받았다. 수도권 공과대에 들어간 두 자녀 등록금을 감당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몸을 누일 곳은 개천 주변의 12㎡(5평)짜리 단칸방이 아닌 84㎡(33평)의 중소형 아파트다. 하지만 주택담보대출 잔금이 아직 1억 원 가까이 남았다. 정년은 3년 남았지만 기간 내 잔금을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한민국 땅에서 가난의 대물림은 죄 인 것 같습니다. 평생을 돈벌이에 몰두했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네요. 고민요?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고민은 생계비 마련과 자녀 교육비일 것입니다. 사실 생계비 마련에 본인의 건강을 뒤로한 채 살아갑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하죠. 가족을 위해 살아가지만 정작 가족과의 대화는 단절됐습니다. 딸 아이와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언제인가 싶습니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은 자녀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버지들의 삶이죠. 저는 허기진 배를 웅크렸지만 자녀들의 배를 굶기는 일은 죄악 아닙니까."

휴일엔 등산복 차림으로 빈 사무실을 찾았다. 집에 있으면 가족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골프 라운딩을 다닌다는 동창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소주를 기울일 수 있는 친구는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직장인이었다.

정년을 눈앞에 둔 동료들의 가장 큰 고민은 은퇴 후의 삶이다. 노후보장은 둘째 치고 자식들 전셋값은 마련해 줘야 하는데, 현실의 통장잔액은 마이너스다. 최근 퇴직금으로 삼겹살 점포를 개업했다는 한 친구는 경기불황 여파로 월 매출이 직장 다닐 때보다 적다고 하소연을 털어놨다.

매스컴에서는 100세 시대 정년연장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55세 이후 직장에 남더라도 찬밥신세다. 화려한 스펙을 지닌 후배들을 보고 있자면 새벽 영어학원을 등록해야 할 것 같고, 굳어버린 머리가 원망스럽다.

결국 소리 없이 울어야만 했다. 소리 없는 울음을 묵묵히 지켜 본 건 아내였다. 박미자라는 이름을 지녔음에도 `○○이 엄마`, `○○이네`, `○○이 아줌마`로 평생을 불리며 살아온 아내. 아마 아내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미자라는 이름을 잃었는지 모른다. 중·고교 진학은 오빠나 남동생만이 누릴 수 있는 세계였기 때문에 미자의 가방 끈은 초등학교가 전부였다. 늦은 밤 오빠의 책가방에서 꺼낸 학습지를 훔쳐 볼 때면 `전기세 아깝다`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눈물 젖은 밤을 보내야 했다던 미자.

19살 꽃 다운 시절 시집을 온 이후 30년간 한 이불을 덮고 지냈지만 정작 아내를 웃게 만든 날은 며칠이었을까.

하루는 아내 몰래 가계부를 들춰봤다. 목록을 살펴보니 월 보험료 30만원, 두 자녀 학원비 60만원, 딸 아이 결혼대비 적금 50만원, 통신비, 세금 및 식비를 포함한 생활비 100만원, 남편과 두 아이 한 달 용돈 100만원, 주택담보대출 원금 및 이자 70만원 등이 이미 월 급여를 넘어섰다. 마이너스 통장 하나쯤은 지니고 있을 것 같다. 정작 본인을 위한 지출내역이 없다는 게 더욱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한번은 아내가 유일한 모임인 초등학교 동창회를 나서기 전 딸 아이 옷장을 뒤적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큰 맘 먹고 백화점 상품권을 선물했는데 되돌아 온 건 아이들의 옷가지였다.

딸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는 꿈이 뭐였어?"라는 질문을 던진 순간을 기억한다. 아내가 자녀의 삶에 저당 잡혀 접어둔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 상무와 그의 아내 미자씨는 젊을 시절 청춘을 포기했다. 직장과 가정에서는 죽어라 일만 했다. 허리띠를 졸라 매고 열심히 버는 데도 빚은 늘어갔다. 감당하기 어려운 자녀 교육비, 내 집 마련을 위한 대출금 갚기로 어깨를 단 한 번 펴보지 못했다. 소리 없이 울어야만 하는 아버지, 제 이름을 잃어 버린 어머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강대묵 기자 mugi1000@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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