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년층이 본 시대

딱 10년 전이다. 아픈 곳 없이 어디든 펄펄 날아다녔던 60대 초반. 사람 구실이라도 할 수 있었던 때다. 어디 사람 구실만 했던가. `사장님`이라는 최고의 호칭까지 들어가며 잘나갔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인생의 피크를 꼽자면 20대 때다. 그 때는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나에게도 늘 일자리가 있었다. 농삿일 밖에 할게 없었던 고향 충남 변두리 지역과 달리, 서울에는 하루벌이지만 일자리가 넘쳐났다.

1960-1970년대는 건설붐이 일어났던 때라 새벽 인력시장에는 나처럼 시골에서 갓 올라온 빡빡머리 청년들로 그득했다. 하루에도 한 자리에서 100-200명의 `품팔이`들은 팔려갔고, 머리맡에 논 물 그릇이 쨍하고 얼 정도로 추운 막사 같은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사기간 동안 몇 달이고 견뎠다. 머릿 속엔 악착같이 돈을 모아 단칸방이라도 얻어야 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 쉴새없이 일하니 간신히 전세 30만 원 짜리 단칸방을 마련했다. 그 후 20 여 년 동안 막노동부터 시작해 가스배달, 식당 종업원, 과일도매 까지 안해 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토록 공부하고 싶어했던 막내동생을 불러와 명문대 법대에 입학시켰고, 두 여동생도 중학교 졸업하자 마자 방직공장에 취직시켰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야간고까지 졸업한 두 여동생은 시집가서 그럭저럭 잘 살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줄로만 알았던 남동생은 학생운동 한다고 경찰서에 들락거리더니 지금은 영세한 출판사에서 일한다. 임신한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다던 군고구마 값 까지 아껴 마련해 줬던 법대 등록금이 허무해져 한동안 남동생은 보지도 않았다.

내 나이 마흔 다섯이 되던 1989년은 잊혀지지 않는다. 10년짜리 적금으로 마련한 중소형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 빚을 얻고, 5년 만기 적금을 보태 85m²(25평) 되는 번듯한 삼겹살 집 문을 열었던 날, 아내 몰래 뒤돌아 서서 눈물을 훔쳤다. 그 후 9년 동안은 말 그대로 `대박` 이었다. 20년 전 만해도 특별한 날에만 먹던 고기를 젊은 사람들은 회식 입네 하며 매일같이 먹어댔다. 고기 팔아 은행 빚을 갚고 38평짜리 아파트로 넓혀 이사 갔고, 두 아이는 먹고 싶다는 거 다 먹였다. 하지만 딱 9년 이었다. 98년, 광풍처럼 IMF는 밀어닥쳤고 이 악물고 버텼지만, 고기 먹으러 오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었다. 삶이 퍽퍽해지면 첫째로 제 입에 들어가는 걸 줄이기 마련이다. 3년도 채 안돼 그동안 벌어 놨던 것을 앉아서 다 까먹었다. 은행 이자에 집까지 저당 잡히기 전에 식당을 접고 택시운전대를 잡았다. 하루에 16시간. 잠자고, 밥 먹고, 화장실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한 평도 채 안되는 공간에만 머물렀다. 오줌이 마려워도 참고 운전하다가 방광이 터질 것 같으면 그 때 화장실로 뛰어갔다. 점심은 늘 삼각김밥 두 개과 우유 한 개. 오십이 넘어 밤눈이 흐릿해졌지만 야간에 운전 안하면 사납금을 제하고 남는 게 없었다. 고단한 삶의 찌꺼기를 게워 낸 차 안 구토 흔적을 닦아 내고, 아들 뻘 손님이 300원 거스름돈 남기면 고개를 굽실거렸지만, 손에 쥐는 건 기름 값을 제외하고 한달에 200만 원 남짓 뿐. 노후 준비는 어림없었다. 세끼 굶지 않고 대출받은 대학등록금을 갚으면 끝이었다.

어느 덧 내 나이 61세. 40년 넘게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해서인지 안 아픈 곳이 없었고, 정신마저도 깜박깜박했다. 안 되겠다 싶어 난생 처음 받아 본 건강검진에서 노인성 치매, 알츠하이머 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다. 앞으로 몸이 약한 부인은 어떻게 살며, 사업한다고 빚진 아들은 어떻게 하나. 그나마 딸은 시집 보내놔서 다행이었다. 나는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동갑내기 부인이 내 약값이라고 번다고 대학교 청소일을 시작 했다….

"진성 할아버지, 점심 드실 시간이에요."

간병인의 말에 불현듯 잠에서 깨어난다. 여기가 어딘가. 눈을 떠 보니 요양원이다.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가. 벌써 6년 전이던가, 7년 전이 던가. 집사람이 어디 있는 지 묻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호스가 꽂혀있는 내 목에 간병인은 하얀 액체를 흘려보낸다. "진성 할아버지, 할머니 찾으세요? 바로 옆 병실에 계시잖아요. 할머니는 휠체어에 태워 올게요. 그런데 따님이든, 아드님이든 빨리 밀린 요양원비 내라고 하세요. 벌써 8개월치나 밀렸어요. 아드님은 아얘 연락도 안돼요. 행정부장님이 이번 달까지 안내시면 곤란하다고 하시네요. "

어릴 적 키우던 소 마냥 코 줄을 매달고, 살에는 허연 비듬이 내려 앉은 70대의 나. 백내장 때문에 앞에 뿌옇게만 보이는 내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만 죽 흐른다.

김효숙 기자 press1218@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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